섹시한 소피아 아가씨들

2003. 5. 6 화요일. 맑음(여행 3일째날)

소피아

  이상고온현상으로 엊그제부터 갑자기 더워졌다는 날씨는 습도는 적지만 우리 나라 한여름같이 덥다. 그러나 아침공기는 긴 겉옷을 입을 만큼 쌀랑하고 산뜻하다. 소피아의 첫인상이 시베리아의 도시 하바로브스크와 비슷했다. 사람들의 순박한 표정이나 꾸민 흔적 없는 거리풍경이나 자작나무 가로수와 낡아 보이는 건물들이나 포장이 벗겨진 움푹 패인 널찍한 도로가 10년 전 여행했던 하바로브스크가 연상됐다. 거리를 달리는 트롤리 버스와 낡고 오래된 트램이 더욱 그런 인상을 준다.

  이른 아침 호텔 근처 대로변으로 나갔다. 길가에 들개들이 늘어져 자고있고 낡은 자동차들이 거리를 달린다. 간이가게인 키오스크도, 허름한 상점의 물건들도 소박하기 그지없고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어수선한 거리가 낯선 곳에 와있다는 실감을 더해준다. 서너 송이 꽃을 놓고 파는 꽃가게 아주머니가 열심히 물 뿌리며 가게 앞을 청소하고 헌책 몇 권을 놓고 파는 아저씨도 낡은 나무받침대를 정성껏 닦는다. 자본주의 잣대로 본다면 모든게 어설프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삶의 열기 같은 그 무엇이 찬 공기 속에서 확 느껴진다. 사람사는 냄새라고나 할까.

  화려한 꽃처럼 거리를 활보하는 아가씨들만이 최첨단이다. 큰 가슴, 팍 퍼진 엉덩이, 쭉 뻗은 곧은 다리, 금발머리의 치렁거림, 빛나는 흰 피부, 배꼽을 드러낸 쫄티, 찢어질듯 꽉 끼는 바지, 섹시함을 맘껏 뽐내는 아가씨들의 차림새가 놀랄 만큼 대담하고 자유롭다. 이들에게서 폐쇄적인 사회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허긴 지구촌 골짜기까지 자본주의 상업성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는 현대가 아닌가. 젊음의 화려함이 어수선하고 낡아빠진 도시에 생기와 탄력을 준다.

  오후 5시가 넘어 민사장이 렌트카를 가져왔다. 차를 보는 순간 아찔했다. 아니 앞이 캄캄했다. 혹시 폐차장에 갈 차가 잘못 온 것 아닌가? 돈 받고 빌려주는 렌트카 맞나? 민사장 가져온 렌트카는 낡고 헐어 뭐 하나 제대로 된 것 없는 97년산 영제 ROVER 소형차로 210137Km를 뛴 차다. 엔진, 브레이크, 타이어만 있고 그 외의 방향지시 등, 후진 등은 아예 먹통이다. 본넷트를 열어보니 덕지덕지 낀 먼지하며 내부의 시트랑 계기판이랑 어느 것도 온전한 게 없다. 이런 차가 어떻게 굴러갈까? 이 차로 36일간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세 나라를 여행을 한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겨우 잠재워놓은 불안감이 태풍으로 돌변한다.

  물론 루마니아가 포함돼 있어서 에어컨 있는 오토매틱 차는 렌트하기 어렵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정돌 줄은 몰랐다. 민사장은 루마니아로 가는 차는 부속을 뜯어가 차체만 남는 도난사고가 많아서 이런 차 이외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우린 그 동안 여러 번의 렌트카 여행을 했었다. 미국에서도, 이스라엘에서도 그리고 96년 북유럽에서도. 그러나 20만을 넘게 뛴 고물 렌트카가 있는 줄 몰랐다. 북유럽 여행 때 빌렸던 작고 야무진 독일 오펠 아스트라를 생각하니 더욱 기가막혔다. 여행 자체보다도 고물차가 잘 달릴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더 절박했다. 다른 선택이 없는 상황 앞에서 사색이 된 우리가 뱉은 말은 "달리고 서고만 잘하면 되지 뭘 더 바란담".

  민사장은 서류 한 뭉치를 건네준다. 한가지 중요한 서류가 빠졌는데 내일 아침에 받아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루마니아나 그리스 국경을 통과할 때 주의할 점도 일러준다. 국경통과는 한 두 시간 걸릴거구 아예 패스포드에 10유로를 넣어 내미는 사람도 있다고. 달롱의 원본은 절대 내주지 말고 카피본만 제시할 것, 잽싸게 달롱을 훔쳐 도망가는 경우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국경근처에선 카메라는 절대 꺼내지도 말라고, 괜한 시비가 붙을 수도 있다고. 그 외에도 많은 주의 사항을 알려준다. 밀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범죄에 가담하는 것도 아닌 단순 여행인데... 불안정한 사회의 현실이 씁쓸할 따름이다. 민사장이 돌아간 후 무거운 침묵 속에 둘이 마주 앉았다. 내일 아침이면 대장정이 시작되는데 대안이 없는 절박한 상황이에서 맥없이 터져 나온 말 "7년 전 년 북유럽 여행 때의 우리 체력이나 정신력과 지금의 체력과 정신력이 꼭 오펠과 로바 차이 같군. 그땐 무서울 게 없었는데."

  세계 최고의 물맛을 자랑한다는 불가리아 물을 한 컵 벌컥 들이키고는 확 불을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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