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카 로바로 아테네로 향하다.

2003. 5. 8 목요일. 맑음(여행 5일째날)

멜닉-아테네, 주행거리 682㎞, 주유량 17.67ℓ, 금액 LEV25.80-, 주유량 29.57ℓ, 금액 EUR23.00-

  청아한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 먼동이 트고 있었다. 이렇게 새소리가 청아하게 들리면 난 언제나 95년 페루 안데스 산맥 우루밤바계곡 유카마을이 떠오른다.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린 듯 해발 3400m 깊은 산 속 외딴 마을의 신비스런 새벽이 청아한 새소리와 함께 열리던 그 유카마을의 미명이.

  멜닉마을의 새벽도 사암사이를 높게 나르며 지저귀는 제비 떼들의 청아한 소리와 함께 열리고 있었다. 산뜻한 새벽기운이 신선해서 창문을 열었다. 동화 속 세상에 온 듯, 꿈꾸는 소인나라에 온 듯, 작고 소박한 집들이 계곡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있는 멜닉마을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불가리아에서 제일 작은 마을 멜닉이다.

  어제 릴라계곡에서 오후 5시 30분에 출발한 우리는 7시경에 멜닉마을에 도착했다. 아직 날은 훤했고 언덕 위에 있는 호텔을 찾아갔다. 방이 있냐고 물었고 리셉션에 있는 아가씨는 '니에'라고 고개를 흔들며 아파트만 남아있다고 했다. 아파트가 뭐냐고 다시 물으니 옆에 있던 손님이 스위트룸을 말한다고 했다. 우리가 일본사람인줄 알고 비싼 방을 주려는 아가씨의 의도를 금새 알 수 있었다. 순진해 보이는 아가씨가 방이 없다고 말할 때 어색한 웃음을 짓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산비탈 언덕을 따라 길쭉하게 지어진 호텔은 제법 규모가 컸고 손님이 별로 없는 시즌에 방이 없다고 둘러대기가 쑥스러웠나 보다. 그러나 우린 스위트룸 213호실에 묶기로 했다. 이란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에'가 연상될 만큼 서정성 짙는 흑백영화를 보는 것 같은 멜닉마을 분위기가 아가씨의 둘러됨까지도 순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전망 좋은 스위트룸에선 마을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무 밑에서 할아버지와 소녀와 소년이 공을 주고받으며 싱겁고 단조로운 놀이를 재밌게 하고있다. 그 모습이 하도 정겨워 지금이 21세기라는 것을 잊게 한다. 옛날로 회귀한 듯 소박한 멜닉마을의 목가적 풍경이 어찌나 따뜻하고 살가운지 며칠이고 머물며 누에고치에서 실 뽑아내 듯 이들의 삶의 얘기들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내일은 그리스 국경통과라는 예민한 과제가 있어서 멜닉에 끌리는 마음을 접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공기가 쌀랑한 아침 7시 40분쯤에 우린 멜닉마을을 떠났다. 그리스여행을 끝내고 불가리아로 들어오는 보름 뒤에 멜닉마을에 다시 오기로 하고 국경으로 향했다. 민 사장이 준 정보대로 국경을 넘을 때 필요한 서류를 점검하고 그리스보다 물가가 싼 불가리아에서 기름도 넣었다. 국경으로 향하는 마음은 긴장으로 굳어있는데 문명과 거리가 먼 듯한 농촌풍경은 한없이 드넓고 푸근하다. 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의 느린 걸음, 나귀나 말들이 뜯고있는 연두빛 어린 풀들, 마치를 타고 가는 농부가족의 순진무구한 얼굴들, 무더기로 피어있는 풀꽃들과 바람에 흔들리는 요염한 개양귀비의 진홍색 꽃잎들, 평원의 충만함이여∼. 이 자연 속에서 이를 악물고 달리는 우리만이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이다.

  8시 25분에 국경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어서 국경을 넘으려는 차가 별로 없어서 불가리아, 그리스 두 나라의 출입국 수속이 15분만에 끝났다. 싱겁게 끝난 국경통과다. 머릿속에 강력 접착제로 붙여놨던 국경통과시의 주의사항이 허공으로 사라진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 앞에서 정보는 삽시간에 쓸모 없는 휴지조각이 된다. 하여튼 불가리아를 벗어났다는 사실이 날아갈 듯 홀가분하다. 긴장이 풀어지며 유연성을 되찾는다. 만세다∼.

  국경을 넘으니 분위기가 다르다. 내 마음인가 공기까지 다른 것 같다. 고대문명을 일으킨 땅이 눈앞에 펼쳐진다. 푸른 들녘에 물줄기를 뿜어대는 스프링쿨러, 푸석한 석회암 야트막한 산에 달라붙어 있는 난쟁이 관목들, 뜨거운 태양과 맑은 공기, 북부 그리스의 첫인상이 기름지다. 이런 자연환경적 요소들이 어떤 발효과정을 거쳐 고대 문명을 일으켰을까. 흥분이 인다. 나무, 풀, 돌, 산, 바위, 바람, 공기까지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고속도로는 넓고 포장이 잘 된 왕복 6차선, 달리는 차들도 불가리아와는 천지차이다. 아∼ 그리스다.

  오늘은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케를 지나 아테네 근교 마라톤까지 갈 예정이다. 일방통행이 대부분인 아테네의 복잡한 교통사정 때문에 아테네 근교에서 자고 교통량이 적은 새벽에 아테네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여행 여건이 좋은 그리스여서 마음의 부담이 한결 적다. 기분좋게 달리며 그리스를 즐긴다. 벌써 점심시간이 되어간다. 휴게소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식사를 하고 아테네 지도를 샀다. 낯선 곳을 찾아다닐 유일한 통로인 지도다. 생각보다 복잡한 아테네 지도를 보니 현기증이 났다. 앞으로 석 달 넘게 지도를 보며 찾아다닐 일은 생각하니 아찔했다. 만만찮은 현실 앞에서 여행의 명암이 엇갈린다.

  작렬하는 태양, 깨끗한 파란 하늘, 푸석한 바위산, 굴곡 없이 뻗어있는 고속도로, 지루하리 만치 변화 없는 풍경이 계속된다. 무지막지한 햇빛에 팔뚝은 벌겋게 달아올라 화끈거리고 엔진소리와 바람소리에 오픈카를 탄 것처럼 정신이 없다. 그러나 갈 길이 먼 캡틴 정은 생명줄처럼 핸들을 잡고 달린다. 난 로바를 오픈카라 부르기로 했다.

  창 밖의 풍경이 달라진다 싶더니 오픈카 로바가 테살로니케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테살로니케를 바이패스해야 했는데 어디서 길을 놓쳤을까? 항법사의 첫 번째 직무유기다. 테살로니케는 대단히 혼잡한 대도시여서 일방통행이 대부분인 도로에서 아테네로 가는 방향을 찾아 되돌아 나오기란 수월치 않았다.

  아테네로 가는 E75번 도로를 다시 타는데 한시간 이상을 헤맸다. 격전지를 빠져나온 병사처럼 캡틴 정의 목줄기를 타고 땀이 줄줄 흐른다. E79번에서 E75번 도로로 갈아타는 링 로드 지점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캡틴 정이 길을 찾아 헤매는 동안 나는 해안을 따라 발달한 크고 멋지고 세련된 도시 테살로니케의 구석구석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스 고속도로의 제한속도는 120Km다. 우리의 오픈카 로바는 벌써 7시간째 뙤약볕 아래 달리고 있다. 남북으로 긴 그리스여서 아테네까진 200여 Km도 더 남았다. 오후 3시가 되어간다. 덥고, 시끄럽고, 지루한 오픈카 속에서 우린 점점 지쳐갔다. 서울서 가져온 테이프 조관우 박광성, 임희숙의 골든 힛트송을 크게 틀어놓고 목이 터져라 따라 불렀다. 우리 둘의 목소리와 바람소리와 차소리가 범벅되어 한바탕 흥이 난 난타공연의 난장판 같다. 발악 같은 아우성에 졸음은 달아나고 정신이 든다. 늘어졌던 몸도 제 컨디션을 찾는다.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우린 로밍전화를 가져왔다.

  "엄마! 저예요." 반가운 딸아이의 목소리.

  "오늘이 어버이 날이에요. 여행 잘 하고 있죠? 지금 어디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시끄러워. 엄마! 빨간 카네이션 보이죠? 보내드리니 받으세요." 오늘이 어버이날 이였구나. 내일 아테네서 전화하려했는데 딸아이가 먼저 전화를 했다. "엄마!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니세요." 신신당부다. 아테네 60Km전까지 왔다. 휴게소에서 마라톤 가는 길을 물었다. 10Km만 더 가면 이정표가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마라톤이란 이정표는 보이지 않고 저 멀리 하얀 도시 아테네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난감했다. 어디서 또 놓쳤을까?

  아테네로 진입하는 도로는 서울의 교통혼잡 뺨치게 차들이 뒤엉켜 엉금엉금 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준비로 도시는 성한 곳이 없이 파헤쳐져 있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지만 안다해도 이렇게 길을 막아놓고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니 오모니아 광장 근처의 호텔을 찾아가기란 아예 불가능했다.

  일단 호텔 찾아가기를 포기하고 이정표를 따라 피레우스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피레우스는 에게해 크루즈 배가 출발하는 항구여서 어차피 알아두어야 할 곳이다. 힘겹게 피레우스 항구까지 오긴 왔다. 그러나 여기서도 방향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 시간은 벌써 8시가 다 되었고 불가리아 멜닉마을을 떠난 지 12시간이 지났다. 파김치가 다 된 우린 부두에 차를 세우고 호텔에 전화를 했다. 하루 일찍 도착했는데 방이 있느냐고. 오란다. 내가 택시를 타고 남편이 택시 뒤를 쫓아온다. 이 방법은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숙소를 찾아갈 때 흔히 쓰는 방법이다.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8시 40분. 806호실에 투숙. 오늘 하루 682Km를 달렸다. 그대로 넉 다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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