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세월이 들꽃 속에 묻히다.

2003. 5. 9 금요일. 맑음(여행 6일째날)

아테네

  몸이 천근같아서 오전 내내 물만 마시고 잤다. 지친 몸은 오후 들어서야 추스를 수 있었다. 오후 3시에 있는 포세이돈 신전과 민속춤 공연 투어를 신청해 놓고 있었다. 나그네의 역마살은 꼭 오뚝이 같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는. 햇빛 쏟아지는 거리로 나온 우린 다시 기운을 차린다. 포세이돈 신전이 있는 수니온 만으로 가는 길은 에게 해의 푸른 물빛과 초록빛 숲과 해안 가의 하얀 집들과 세계에서 가장 좋은 기후라는 그리스의 투명한 햇빛과 화려하고 낭만적인 아폴로 코스트의 요트들이 어우러져 현대 그리스의 매력을 한껏 보여준다.

  포세이돈 신전은 2000년 세월을 견뎌낸 열 다섯 개의 대리석 원기둥이 절벽 위에서 하얗게 빛나며 지중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가누기 힘들만큼 불어대는 세찬 바닷바람에 황량한 돌무덤에 납작 달라붙어 피어있는 들꽃들이 옛날이 오늘인 듯, 오늘이 먼 내일인 듯 2000년 세월의 증인이 되어 준다. 신전의 무너져 내린 돌무덤과 들꽃의 강인한 생명력이 폐허 앞에 선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장시켜준다. 앞으로 보름동안 민주주의, 올림픽, 건축, 조각, 철학, 미학, 연극, 의학 등 인류문명의 시원인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문명의 흔적으로 남은 폐허의 돌덩이들이 들려주는 그 많은 이야기들을 듣게될 것이다.

수니온의 바다의신 포세이돈 신전

아테네의 극장식 관광식당 내부

  여행객 천국인 폴라카지구의 밤은 그리스의 또다른 얼굴이다. 소극장 같은 커다란 레스토랑에서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여행객들이 그리스 전통음식과 민속음악과 춤을 즐기며 아테네의 밤 문화에 빠져든다. 무용수의 표정하나, 손끝하나, 발끝하나에 묻어나는 희로애락의 감정에 공감하고 환호하며 악사들이 연주하는 브즈키 음악에 젖어들기도 한다. 공연의 끝 무렵엔 관객과 무용수들이 함께 하는 우리의 강강수월래 같은 흥겨운 춤이 시작됐다. 관광객들은 이색 문화의 원초적 감흥에 어린애들처럼 신바람이 나서 춤을 춘다. 나도 무대 위에서 신나게 춤을 추며 순간의 해방을 즐긴다. 가끔은 이런 탈출을 얼마나 꿈꾸었던가. 얼마나 간절한 삶의 목마름이었던가. 정화된 물처럼 흠뻑 젖은 내 몸에서 청량제 같은 새로운 활력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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