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로스 - 이드라- 에기나 에게해 섬 1일 크루즈

2003. 5. 11 일요일. 맑음(여행 8일째날)

아테네-뽀로스-이드라-에기나-아텐네

  오늘은 살로니크만의 예쁘고 작은 섬인 뽀로스, 이드라, 에기나 섬을 일주하는 일일 에게해 크루즈를 하는 날이다. 아침 8시 픽업하러온 아가씨의 안내로 피레우스항까지 왔다. 날렵한 백색의 배엔 일찍 승선한 사람들이 갑판 위에서 수영복차림으로 햇빛을 쬐고 있었다. 아직 출항도 하지 않았는데 갑판 위는 벌거벗은 사람들로 꽉 찼다. 거대한 실내수영장에 온 듯, 아니 노천 목욕탕에 온 듯 민망해서 눈 둘 곳을 찾는다. 햇빛은 아침부터 눈부시고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린 아가씨의 벤치에 누워있는 모습이 민망하고 늘어지고 튀어나온 비곗덩어리 몸뚱이를 드러낸 노인의 모습은 흉해서 더욱 민망하다. 서양사람들은 왜 그렇게 햇빛에 목을 맬까. 막무가내로 벗는 서양사람들의 심리를 아니 문화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1일 크루즈 여행의 헤르네스호 선상

항구에 정박 중인 헤르메스호

  나는 햇빛을 등지고 그늘에 앉았다. 시원한 바람과 하늘빛과 바다물빛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가방 속에서 마스크를 만지작거렸다. 사스 때문이다. 서울서 크루즈 예약을 할 때 우리에게 꼭 마스크를 해야된다는 단서를 붙었기 때문에 10개의 마스크를 가져왔다. 온통 벌거벗을 사람들 속에서 긴 바지, 긴 팔 블라우스, 챙 넓은 모자, 그리고 마스크까지 한 내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벌거벗은 서양 사람들은 나를 보고 민망해 하겠지. 크루즈의 멋과 낭만도 모른다고. 그들은 '사스공포'와 마스크의 관계에 관심이 없을 테니까…. 배는 뽀로스 섬을 향해 담청색 바닷물을 가르며 에게해로 나가고 승무원이나 어느 누구도 나에게 마스크 운운하는 사람은 없었다.

뽀로스 섬의 시계탑에서 본 섬의 전경

뽀로스 섬 뒷 골목의 신발가게

  작고 귀여운 섬 뽀로스에 도착했다. 해안선의 굴곡을 따라 들어선 하얀 집들과 오렌지색 지붕, 소나무 숲과 올리브 나무, 청록빛 바다와 파란하늘, 화사한 햇빛과 산뜻하고 달콤한 공기. 아∼ 이 청량감∼.

  뽀로스 섬에서 한 시간의 여유를 준다. 섬에 내린 관광객들을 선착장에 떼지어 앉아있는 고양들이 환영해준다. 이놈들은 투명한 눈을 반짝이며 요지부동의 자세로 앉아있다. 마치 섬의 수비대들 같다. 뽀로스의 첫인상이 된 고양이들이 섬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된다. 해안가를 따라 걸으며 타베르나와 카페와 기념품가게를 기웃거리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미로 같은 좁은 길을 빙빙 돌며 독특한 섬의 정취를 맛본다. 그리스 정교회의 파랗고 둥근 지붕 위의 십자가가 에게해의 푸른 물빛만큼이나 파랗다. 지금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이 꿈만 같다.

이드라 섬에는 옛 무역상의 대 저택이 많다

좁은 뒷골목을 막고 있는 당나귀

  배는 이드라 섬을 행해 출항했다. 이드라 섬은 사람이 살지 않은 듯 깨끗하고 조용했다. 파란지붕과 파란창틀과 흰벽이 투명한 햇빛에 반짝인다. 미로 같은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다가 길을 막고 있는 당나귀를 만났다. 길은 두 팔을 벌리면 대문과 돌담에 닿을 만큼 좁아서 대문에 매어 논 당나귀가 비켜주지 않으면 지나갈 수가 없었다. 꼬리로 치거나 뒷발질을 할까봐 겁이 났다. 게걸음으로 조심조심 빠져 나왔다. 겁을 먹은 나를 당나귀가 쳐다본다. 괜한 수선을 떤다는 표정으로. 날 그렇게 모르냐고. 당나귀를 보며 나도 웃었다. 난 널 모른다고.

  섬은 미로마다 진기한 풍경을 보여준다. 작은 문을 열어놓고 레이스를 뜨고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원룸 같은 작은 집에서 레이스 뜨기로 용돈을 번다는 할머니는 흰색의 레이스 보다 더 뽀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골목골목 사이로 보이는 쪽빛 바닷물이 아름답고 창틀에 매단 작은 화분이 귀엽다. 민박집 담 너머 마당에 핀 꽃들이 화사하다. 예쁜 섬과 바다가 에메랄드 보석을 닮았다.

  계단 옆 창고 건물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젊은 여선생님을 만났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주로 바다, 해초, 나무, 풀, 꽃, 새, 바위, 집 등이다. 그림같은 자연 속에서 자연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섬 아이들. 한 소년이 마른 나뭇가지에 여러 가지 색을 칠해놓고 나뭇잎을 모아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에게해 바다가 아이들의 마음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채색하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볼펜 몇 자루를 주었다. 이드라 섬엔 젊은 예술가들이 많이 살고있어서 '예술가의 섬'이라고도 한단다. 예술적 영감이 될 소재가 무궁할 것 같은 이드라 섬은 자동차 출입을 금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당나귀나 도보로 다닌다고 한다. 이드라 섬이 그래서 더욱 에메랄드 보석같이 빛났다.

에기나 섬의 젊은 엄마와 썬그라스의 아기

에기나 섬으로 수학여행 온 초등학교 학생들

  에기나 섬은 이드라 섬의 아기자기함과는 달리 고대엔 막강한 도시국가였던 섬답게 스케일이 크다. 관광객을 태운 말의 뚜벅걸음이 경쾌하고 렌터 바이크로 섬을 일주하는 젊은이들의 질주가 스피디하다. 일요일 오후여서 활기차고 북적거리는 거리는 생동감이 넘친다. 오픈 카페 타베르나도 기념품 가게도 사람들의 들락거림이 쉼 없다. 이 섬에도 고대 유적인 아페아 신전과 아폴론 신전, 멋진 해수욕장이 있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은 바다에 면한 번화한 골목을 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여유밖에 없었다. 구경거리, 볼거리가 많은 골목에 퍼지는 커피향이 유혹적이어서 우린 오픈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연인끼리, 부부끼리, 친구들과,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본다. 우리처럼….

  바닷가로 나왔다. 길가 타베르나에서 맥주를 마시는 젊은 엄마 옆 유모차에 아가가 누워있다. 아가는 엄마와 똑같이 선글라스와 핑크색 운동모자를 쓰고있었다. 7개월쯤 됐을까. 그 모습이 하도 예뻐서 젊은 엄마에게 다가갔다. 젊은 엄마는 아가가 자는 게 아니라고, 단지 선글라스를 쓰고 있을 뿐이라며 아가얼굴의 선글라스를 위로 올려준다. 아∼ 동그랗고 파란 두 눈이 반짝이며 날 쳐다본다. 저 예쁜 눈. 엄마 말대로 아가는 자는 게 아니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아기도 어른들처럼 그렇게 에기나 섬의 석양을 즐기고 있었다. 섬의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목 차]  [전날 2003년 5월 10일]  [다음날 2003년 5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