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터키 쿠사다시의 낭만

2003. 5. 13 화요일. 맑음(여행 10째날)

미코노스-쿠사다시-파트모스

  밤새 항해한 배가 터키 쿠사다시에 도착했다. 쿠사다시와의 인연이 특별하다. 97년 터키 여행 중 쿠사다시에 왔을 때도 지금처럼 5월이었다. 기원전 1200년경에 있었던 전설의 트로이 전쟁을 상징하는 '트로이의 목마'가 있는 히살르크 언덕과 에페수스 유적을 보고 에게해의 절경을 보며 해안가를 따라 내려오다 절벽 위 고급스런 호텔에서 하룻밤을 잤었다. 그곳이 쿠사다시였다. 호텔과 낭떠러지 절벽과 심청의 바다와 주위의 자연경관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바다 바람에 한들거리는 진홍빛 개양귀비 꽃을 따서 종이에 곱게 싸 가져왔었다. 그 말린 꽃잎이 지금도 여행자료모음 파일에 다소곳이 끼어있다. 청명한 날씨는 바다 건너 그리스 땅을 선명하게 보여주었고 언젠가는 가야 할 인류문명의 시원인 그리스 여행을 꿈꾸게 했었다.

터키 쿠사다시의 피죤 섬

공원으로 조성된 피죤 아리랜드

  침실의 동그란 창으로 산뜻한 쿠사다시의 아침정경을 본다. 투명한 햇빛과 하얀 집들과 흰색의 요트와 성채 위에서 휘날리는 터키 깃발을. 오늘아침은 유난히 햇빛이 좋다. 투어 버스가 에페수스로 떠난 후 우린 해변가 성채공원인 피전아일랜드로 갔다. 성채 주위를 숲과 꽃으로 조경을 한 공원은 현지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깔끔하게 공원을 손질하는 정원사의 손길이 바쁘고 물주고 전지하고 다듬는 손길마다 정성이 배어있다. 예쁜 꽃들보다 더 귀해 보이는 정원사의 검게 탄 손이다. 우린 나무 밑 벤치에서 절벽 밑에 펼쳐진 옥청색 바다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본다.

  집을 떠난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힘들고 부담스런 98일간의 여행 중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에게해 크루즈 여행은 우리의 긴 여행의 의도적인 워밍업이다. 비교적 안전한 그리스에서 현지 적응도 하고 감도 익히고, 정보도 수집하고, 체력도 보강하며 자신감과 여유를 찾는 심기일전의 기회로 에게해 크루즈 여행을 택했었다. 그만큼 이번 여행은 모험이고 벅찬 도전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피전아일랜드의 휴식은 약발이 잘 받는 보약 같았다.

  11시 30분, 배는 다시 파트모스섬을 향해 출발했다. 많은 사람들이 갑판에서 일광욕을 즐긴다. 책을 읽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담소를 하면서 햇빛을 쬔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쾌적함은 물론 육감의 상상력까지 자극하는 선상생활은 순간순간이 짜릿하고 신선하다. 승객들은 대체로 가족 단위가 많고 연인인 듯한, 친구들끼리, 몇쌍의 부부가 함께, 그리고 패키지 단체 관광객이 주를 이룬다. 연령층은 중년이상이 대부분이다. 유람선은 좋은 시설과 완벽하게 준비된 프로그램과 정성스런 서비스로 승객들의 기대와 호기심을 만족시킨다. 선 내에서 서빙과 잡다한 잔일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필리핀이나 동남아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영어가 되니깐 싼 임금에 활용도가 많아서일 게다. 영어가 돈이 되는 현장이다.

  크루즈 여행은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움직이므로 시간시간 영어와 몇 개국어로 안내를 하고 여러 나라 말로 된 안내서가 늘 비치되어있다. 따라서 유람선 일정과 프로그램과 세부사항을 잘 알고 있어야 편리하다. 예를 들면 섬에 도착하여 투어를 시작할 때도 단체손님은 몇층 출입구로 하선하라, 개인으로 온 손님은 몇층으로 나가라, 영어 안내팀은 몇번 버스를, 독일어 안내팀은 몇번 버스를 타라는 등 미리 미리 안내를 한다. 그 외에도 자세한 안내사항이 많아서 항상 귀를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 하선하는 승객들은 선착장에 세워놓은 돌아올 시간을 표시한 커다란 시계그림을 보고 시간 내에 돌아와 승선한다. 승선할 때 자신의 아이디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들어오는데 전원 승선이 확인되면 배는 출항한다.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아름답고 짙푸른 바다를 에게해라고 한다. 에게해에는 2000개가 넘는 섬이 흩어져 있어서 빼어난 섬여행의 매력과 크루즈 여행의 묘미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눈부신 섬 곳곳엔 오래된 역사의 흔적과 문화 유적이 많이 남아있어 역사 속으로의 여행도 겸할 수 있어서 에게해 크루즈 여행은 언제나 인기있는 관광코스가 된다.

  선상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에게해의 풍광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일광욕하는 사람, 사진을 찍는 사람, 스케치를 하는 사람, 메모지에 뭔가를 쓰는 사람, 포옹과 키스를 하는 사람들, 혼자 앉아 편지를 쓰는 사람, 유람선 풍경도 가지각색이다.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일종의 질병이겠지만 몸무게가 몇백 킬로그램은 될법한 부인을 특수 제작했을 휠체어에 앉히고 흴체어를 밀어주는 마른 몸매의 남편의 모습이다. 가슴이 찡하다.

 

파트모스 섬의 성 요한 동굴 입구

요새 같은 성 요한 수도원

  자연은 어쩌면 저렇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경이롭기만 하다. 에게해는 바다가 아니라 거대한 호수 같다. 힘차게 파도 치는 거친 바다가 아니라 잔잔하고 고요한 부드러운 바다다. 물색도 비취색과 담청색으로 아름답고 포근하다. 크고 작은 섬들이 이어지는 바다 위에 쏟아지는 햇빛이 눈 시리게 투명하고 사람이 사는 섬은 예외 없이 해안가를 따라 새하얀 집들이 들어서 있다. 하늘빛에 따라 달라지는 바닷색이 신기하기도 하다.

 오후 3시에 파트모스 섬에 도착했다. 파트모스 섬은 산이 많은 섬으로 성 요한과 인연이 깊은 섬이다. 로마인에게 추방당한 요한이 이 섬으로 들어와 동굴에서 살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묵시록을 썼다고 한다. 요한이 살았던 동굴은 경사가 급한 암벽에 있는데 성인 요한이 누워있던 머리부분과 일어날 때 오른손으로 바위를 잡았던 자리는 까맣게 손때가 묻어있고 움푹 패여 있었다. 머리와 손이 닿았던 두 자리는 황금색 금속으로 둥글게 표시해 놓았다. 성인이 피땀 흘리며 고뇌한 서늘한 동굴의 서기는 마음까지 경건하게 한다.

  파트모스 섬은 화려하고 낭만적인 에게해의 다른 섬과는 달리 황량하고 삭막한 느낌의 섬이다. 그래서 로마시대엔 유배지였다고 한다. 산 정상에 있는 성 요한 수도원으로 가는 길도 급커브가 많고 기복이 심해서 아슬아슬하다. 1088년에 세워졌다는 수도원의 구조는 꼭 미로 같다. 수녀님들이 수도원을 보존하고 있는데 수도원 입구엔 반바지차림의 관광객을 위해 긴치마와 긴바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수도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으며 프레스코화와 이콘성화. 성인의 초상화, 성서 등 소장품들이 많았다. 기념품가게엔 수도사들이 그린 이콘성화를 많이 팔고 있었다. 성 요한은 묵시록을 쓴 후 터키 에페수스에서 104살의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이 척박한 섬에서 요한 성인의 피땀의 결정체 묵시록이 완성됐다는 사실이 감명 깊었다.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피땀의 열매라는 진리가 새삼스럽다. 우리도 크루즈 여행의 호사가 끝나면 예측불허의 험난하고 고된 유랑이 시작될텐데 그 힘듬이 어떤 열매를 맺을까….

  저녁 7시 만찬이 시작되니 정상차림으로 시간을 지켜달라는 안내방송이 있었다. 어제는 승객들이 미코노스 섬에서 늦게 돌아왔기 때문에 정식 만찬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저녁이 승선 후 첫 만찬이 된다. 정각 7시, 다이닝룸 문이 열렸다. 화려한 정장차림의 사람들이 입장을 한다. 음악이 흐르고 번쩍이는 제복을 입은 호스트의 안내를 받으며 자기자리에 앉고 옆 사람들과 인사를 한다. 그리고 다양한 메뉴 중에서 전채와 메인 요리와 후식을 주문한다. 풀 코스의 요리가 한가지씩 나오고 만찬장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익어간다. 음악과 음식과 격식과 담소와. 이렇게 만찬이 시작됐다. 스페인어를 하는 한 무리의 단체손님과 연인인 듯한 독일어를 쓰는 중년남녀가 우리 좌우의 테이블에 앉았다. 우린 서로 미소와 눈길만 주고받을 뿐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여행이라는 공동의 정서가 서로를 묶어주어 자연스레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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