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도스 섬의 여름풍경

2003. 5. 14 수요일. 맑음(여행 11일째날)

파트모스-로도스

새벽녘에 깬 나는 캐빈의 동그란 창으로 어둔 바다를 본다. 바다의 고요와 섬들의 느릿느릿한 스침과 어슴푸레 어둠이 걷히는 에게해의 미명과 바다에 비친 반짝이는 불빛의 입자들을 본다. 혼자 깨어있는 이 시간엔 낯에 본 낯설고 색다른 풍경이나 체험들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그리고 내 내면의 캠퍼스에 소중히 다시 모자이크하며 차곡차곡 추억을 쌓아간다. 배는 아주 조용히 또 다른 섬을 향해 항해하고 이른 새벽의 나홀로 시간에 나는 또다른 하루를 준비한다. 소진됐던 에너지가 서서히 생성된다.

아침 6시, 배는 로도스 섬에 입항했다. 다른 섬의 첫인상과는 달리 항구에 면한 중후하고 우람한 중세 분위기의 성곽과 성벽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유람선이 로도스 섬의 올드타운으로 기항했기 때문이다. 로도스 섬은 장미의 섬이라는 뜻으로 에게해 섬 중에서 네 번째로 큰 섬으로 시내버스를 이용해야할 만큼 아주 크다. 고대엔 해상교통의 요지로 경제적으로 번영했던 곳이고 중세엔 예루살렘 기사단의 근거가 되었던 곳으로 로도스 시의 구시가지는 마을 전체가 마치 기사단 박물관 같기도 하다. 고대유적과 풍부한 햇빛과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천혜의 관광 휴양지 로도스 섬은 그래서 일 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린도스의 아크로폴리스, 니케상의 터가 있다

제일 높은 곳에 아테나 린디아 신전이 있다

유람선은 로도스 섬에서 하루종일 기착했다. 우린 섬에서 가장 큰 마을인 린도스의 아크로폴리스 유적인 아테나 린디아 신전으로 갔다. 로도스 시에서 55Km정도 떨어진 이 마을은 마을 전체를 고고학 유적지로 지정하고 있어서 차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마을 입구에서 산 정상의 신전까지 아크로폴리스를 향해 올라가는 초입에 '이곳에 니케의 조각상이 있었다' 라는 표시가 있다. 도로스 섬이 '니케 조각상'의 고향이었다. 지금은 루불박물관에 있는 니케 상. 몇 년 전 고향에 돌아와 전시되었던 정선의 몽유도원도를 보고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이곳도 신전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신전은 군데군데 대리석 주랑들이 남아있어서 장엄했을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주랑의 긴 그림자 그늘 속으로 파고든 고양이들이 한 낯의 햇빛을 피해 길게 드러누워 있다. 환경에 적응하는 지혜를 터득한 고양이들이다. 포세이돈 신전이 있는 아테네 수니온 곳보다 더 수려한 자연경관이 쏟아지는 햇살에 눈부시다. 에게해 섬들의 주역은 역시 투명한 햇빛이다. 빛과 물의 조화가 화음과 리듬의 조화처럼 환상이다.

로도스 구시가의 암보아스 성문

로도스 구시가 중심 에브레온 광장

저녁 6시 승선까지 자유시간이다. 날씨는 쾌청하고 잉크빛 바닷물은 잔잔해서 그윽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에게해를 '액체로 된 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로도스 시의 구시가지는 1080년 경 자선을 목적으로 발족한 기사단이 제1차 십자군 전쟁 때 군사적인 종교 기사단이 된 이래로 기사단의 역사적 흔적과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중세 기사단의 병원이었던 고고학 박물관, 기사단 거리, 기사의 관저, 기사단장의 궁전 등을 구경하며 포석깔린 골목길을 돌며 볼거리 많은 로도스의 여름 활기 속으로 빨려든다.

여름철이면 유럽에서 전세기 편으로 관광객이 찾아온다는 섬답게 생기 넘치는 거리는 화려한 상품과 멋진 카페들이 즐비하다. 항구에서 깊숙이 들어갈수록 좁고 아기자기한 골목이 멋스럽고 둥근 아치형 측벽이 옛스럽게 골목 위를 가로질러 양쪽 집 벽을 버텨주고 있다. 퍼석까린 내리막길을 자전거를 탄 아이가 곡예 하듯 위태롭게 내달린다. 골목 안 가죽제품을 파는 가게 주인이 우릴 보고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콧수염이 멋진 남자는 코리안이라고 하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권도 폼을 잡는다. 아들이 10살인데 태권도를 배운다고 했다. 검은 띠를 맨 아들사진이 가게에 걸려있다. 눈이 초롱초롱한 아들은 아버지를 닮았다. 태권도를 배우면서 아주 적극적이 된 아들이 자랑스럽다며 흐뭇해하는 아버지. 이세상 부모의 마음은 어디간들 다르랴 싶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그리스 전통주 우조를 한잔 준다. 우조 한잔에 아들과 태권도와 그리스와 코리아가 녹아든다.

건너편 주택가에서 공을 차며 노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아들이 태권도를 계속하기를 바란다는 아버지의 두 눈에 희망이 반짝인다. 아버지의 아들이 저 아이들 속에서 공을 차고 놀고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태권도는 아들에게 큰 용기가 될거라'고 맞장구를 쳤다. 우린 가게주인과 작별했다. 로도스 섬과의 작별의 시간도 다가오고 있었다.

배가 출항하고 저녁식사가 끝나면 다양한 공연과 이벤트가 있어서 각자의 취미와 기호에 따라 밤시간을 즐길 수 있다. 카지노, 극장, 카페 등 선 내의 시설을 이용하기도하고 메인 홀에서 댄스파티나 나이트쇼를 즐기기도 하고 민속춤 공연을 구경하기도 하고 갑판 위 비치테이블에 앉아 밤바다와 별을 즐기기도 한다. 바다 위의 또다른 섬인 배 안에서 저마다 추억을 만들어 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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