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 섬의 아침과 산토리니 섬의 석양

2003. 5. 15 목요일. 맑음(여행 12일째날)

로도스-크레타-산토리니

  에게해 크루즈 여행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크레타 섬과 산토리니 섬으로 간다.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크레타문명을 일으킨 섬 크레타가 눈앞에 있다. 얼마나 아득했던 크레타 섬이었던가. 아침 7시 40분, 유람선은 꿈같이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에 우릴 풀어놓았다. 크레타 섬은 거대한 도시였다.

  버스가 크레타문명 유적인 크노소스 궁전으로 가는 아침, 출근시간의 교통혼잡이 장난이 아니다. 크레타 섬도 올림픽 준비로 곳곳에 건설·토목공사가 있어서 흙먼지와 크레인과 불도저가 뒤엉킨 거리는 아침부터 교통체증이 대단했다. 트래픽에 걸려 움직일 줄 모르는 버스는 그러나 크레타 섬사람들이 시작하는 아침 풍경을 보여준다. 가방을 메고 학교가는 초, 중등학생들이 줄줄이 지나간다. 청소년들을 보면 희망과 미래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짓궂게 장난치는 개구쟁이 남학생들은 우리아이들과 다를 바 없고 잔뜩 모양을 낸 여학생의 터질 듯한 청바지가 긴 다리의 실루엣을 드러낸다. 우리 나라 아이들이 즐겨입는 찢어진 청바지패션은 없었다. 십자가와 울긋불긋 조화가 놓여있는 공동묘지도 주택가에 접해있고 누군가의 이승에서의 마지막날을 위해 흰국화와 노란국화를 손질하는 사람과 까만 리무진을 반짝반짝 윤나게 손질해 놓은 장의사도 보인다. 개를 데리고 아침 산책을 마친 부부가 빵 가게에서 바게트빵을 사들고 나온다. 정장차림의 셀러리맨들의 출근길이 바쁘고 쇼윈도를 닦고있는 여종업원의 손놀림이 잽싸다. 가게 앞 화분에 물을 주고있는 아저씨가 조각처럼 번듯하고 배낭족 나그네가 어디론지 가고있다. 생기있는 크레타 섬의 아침이다.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 유적

크노소스 궁전의 보원된 벽화

  버스는 이라클리온 시내를 벗어나 크노소스 궁전유적에 도착했다. 날씨가 흐렸다. 그리스에서 처음 보는 구름이 오히려 반갑다. 햇빛이 숨은 야트막한 산기슭 언덕에 소나무가 무성하고 그 너머로 넓은 유적지가 흩어져 있다. 약 3700년 전 크레타 섬에서 번영했던 미노아 문명의 궁전 터인데 일부는 복원되어 4층 건물의 벽화가 생생하게 재현되어있고 일부는 발굴을 멈춘 채 유적지의 흩어진 돌로 뒹굴고있다. 오르락내리락 만들어놓은 가교를 따라 넓디넓은 유적지를 돌아본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6000∼3500년전) 크레타 미노아 문명에 대한 흥미진진한 추리와 신화이야기 그리고 신화가 역사가 된 에반스의 발굴과 복원이야기, 고도로 발달된 문명인 미노아 문명이 지구상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유 등 신비롭고 재미있는 역사이야기를 능숙하고 열정적으로 가이드(중년남자)는 설명을 한다. 똑똑한 영어발음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가 진지하다. 설명을 듣는 일행들의 눈빛도 빛난다. 귀머거리인 나는 준비해온 자료를 보며 답답함을 달랜다. 학교 다닐 때 땡땡이 치며 영화구경 다니기 좋아하던 내가 절절히 후회한다. 영어공부 좀 열심히 할걸....

  미노아 문명의 모든 것이 전시되어있는 고고학 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은 23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굴된 벽화나 유물은 물론 석기시대에서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출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도 대표적인 출토품들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이 또랑또랑하다. 언제나 박물관 관람은 흥미롭다. BC 1600년 전의 크노소스 궁전에서 출토된 양손에 뱀을 쥐고 있는 '뱀의 여신상'은 그 정교한 아름다움이 세월의 퇴적을 벗겨낸다. 크레타 섬은 대단히 큰 섬이고 고도의 문명유적의 보고로서 볼거리가 무궁한 섬인데 맛만 보고 떠나는 마음이 몹시 아쉽다. 버스는 다시 이라클리온을 행해 크노소스를 출발했고 유람선은 크레타 섬을 뒤로하고 산토리니 섬을 향해 다시 바다로 나간다.

산토리니 섬을 향하여 Triton호에 승선하다

작은 배로 산토리니의 항구에 내리다

  에게해 크루즈 마지막 기착지 산토리니 섬이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오후 4시 30분이었다. 94년 가을,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오는 KAL비행기 안에서 모닝컴 잡지에 실린 일본인 자유기고가가 쓴 '산토리니 기행'을 읽었다. 호객꾼인 토니를 만나 그의 안내로 섬을 돌아보는 내용이었는데 적갈색 단애 위에 흰눈처럼 하얗게 달라붙어 있는 하얀 집들이 있는 이색적인 풍경사진보다도 흰벽과 파란색 둥근 교회지붕이 석양에 붉게 물들어 가는 묘한 분위기의 칼라사진이 어찌나 가슴 설레게 하는지 그때 산토리니는 내 안에 깊이 각인되어 버렸다.

  씨라라는 이름으로 그리스사람들이 부르는 섬 산토리니는 외양부터가 다른 섬과는 확연히 다른 화산섬이다. 온화하고 낭만적 분위기의 미코노스 섬과도, 산뜻한 리조트 같은 쿠사다시 만과도, 척박하고 황량한 인상의 파트모스 섬과도, 육중한 성곽에 둘러 쌓인 중세도시 같은 로도스 섬과도, 섬이 아니라 대륙의 일부같은 거대한 크레타 섬과도 너무나 다른 첫인상이 강렬하다. 담청색 바다 위에 적갈색 단애가 완강한 벽처럼 가로막고 서 있어서 먼바다에서 바라보는 씨라는 다가갈 수 없는 경외의 고도 같기도 하고 장엄한 비밀을 간직한 신비의 땅 같기도 했다. 그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 있는 하얀 집들이 흰 빙하처럼 보인다. 그래서 산토리니 섬은 섬과 마주한 그 자체로도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된다. 우리가 타고 온 대형 유람선은 항구에 들어갈 수 없어서 항구에서 떨어진 만 내에 배는 정박했고 작은 모터보트가 승객을 올드포트로 실어 나른다.

  버스는 가파른 암벽길을 빙빙돌며 섬의 중심지 피라 시를 향해 올라가는데 눈 아래서 출렁이는 짙푸른 바다로 추락할 듯 아슬아슬하고 좁고 험한 바위산 길을 굽이돌고 꺾어질 때마다 버스가 암벽에 부딪칠 것 같아 조마조마하다. 바다에서 본 단애의 산토리니 섬이 범접하기 힘든 절대 권위와 위엄의 이미지라면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와 섬의 중심지 피라 시로 가는 길의 거칠지만 부드러운 자연은 따스한 정은 감춘 무뚝뚝한 아버지의 침묵 같은 온정이 느껴졌다.

산토리니 섬의 이아 시내의 모습

남향 비탈을 따라 있는 아름다운 건물들

  피라의 번화가 풍경은 산토리니의 또다른 유혹이다. 미로 같은 좁은 골목엔 멋있고 특이한 눈요기 감이 많아서 숨바꼭질하는 술래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게된다. 타베르나의 싱싱한 해산물들, 카페의 로맨틱한 인테리어와 불빛, 선물가게의 화려한 민예품들, 산토리니 특산품인 갖가지 열매들, 보석가게의 세련된 액세서리, 그리스적인 예쁜 아트 상품들, 골목 끝 낭떠러지 바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붓놀림, 언덕 밑 굴곡 심한 골목에서 물총을 쏘며 노는 아이들, 어슬렁거리는 개들, 피라의 유혹은 끝이 없다.

  섬의 북쪽 끝에 있는 이아 시로 왔다. 작은 마을은 온통 새하얀 벽과 청색지붕의 집들과 교회가 에게해를 향해 낭떠러지 절벽에 매달리듯 촘촘히 붙어있다. 단순의 미학이랄까 화이트·블루 색의 대비가 강렬하다. 넘어질 듯 가파른 골목을 내려와 작은 테라스 카페에 앉았다. 둥근 테이블 2개와 의자 4개뿐인 작은 공간이다. 그러나 이 작은 가시적인 공간은 소실점 없는 탁 트임이 하염없어서 하늘과 바다와 저물녘의 고즈넉함과 맞닿아 있는 무한의 공간이었다. 끝없는 수평선 너머의 희뿌연 시공을 더듬는다. 안개 속 같은 우리의 여행도 무한의 공간처럼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는 하염없는 헤멤이다. 년 전 비행기 속에서 일본 자유기고가가 쓴 '산토리니 기행'을 읽고 가슴 설레던 그 설렘은 끝없음에 대한 동경이었는지도 모른다.

  피라 시로 돌아온 우리는 당나귀와 케이블카 중 어느 하나를 택해 항구로 돌아가야 했다. 관광객의 발이 된 당나귀는 온종일 뙤약볕아래 580계단의 지그재그 비탈길을 오르고 내린다. 색다른 체험과 멋진 추억을 만들고 싶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줄 너머로 케이블카가 올라오고 있었다.

  승객들이 모두 승선 한 선내는 크루즈 여행의 마지막 날이어서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다.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는 승무원들의 잰걸음은 물론 맡은 임무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승무원들도 바삐 움직인다. 특히 출항준비 하는 승무원들의 모습이 빈틈없고 진지하다. 승객들 풍경도 아쉬움이 역력하다. 석양에 물든 산토리니 정경을 담으려는 카메라 메니아들, 조용히 무언가를 노트에 메모하는 사람, 혼자서 한곳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 휠체어를 탄 부인 옆에서 속삭이는 남편, 포옹하고 있는 연인들,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노부부, 서운한 듯 오락가락 하는 사람, 지구촌 사람들이 다 모인 유람선 안의 풍경이 만화경 같다. 나는 서울로 전화를 했다. 눈물겹게 반가운 가족들의 목소리. 몸조심하라는 말이 전부인데 목이 메인다. 산토리니의 감동과 감흥을 설명한 길 없는 나는 그저 "응" "응" 대답만 할뿐이다. 잡지에서 본 사진 그대로 붉게 물든 석양이 교회와 집들의 흰색과 푸른색을 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Triton호의 만찬장

만찬장의 웨이터

  유람선의 마지막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우린 여권을 돌려 받고 봉투에 팁 80불(한사람당 40불씩)을 넣어 메인 홀 박스에 넣었다. 그리고 만찬장으로 갔다. 마지막이라는 아쉬움 때문인지 음악과 분위기와 요리와 호스트의 서비스와 한잔의 포도주가 각별하다. 시작의 마음과 끝남의 마음이 같을 수는 없지만 색다른 여행문화체험이 된 크루즈 여행이 잔잔한 감동이 된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갑자기 만찬장의 불이 꺼졌다. 깜깜한 실내. 본능적으로 긴장한다. 어리둥절하는 순간 '꽝'하는 폭발음과 함께 음악의 볼륨이 커지며 호스트들이 한 줄로 서서 입장한다. 오른손에 받쳐든 큰 쟁반 위에서 가늘고 긴 불꽃들이 타다다닥 소리를 내며 형형색색으로 터진다. 깜깜한 실내에 화려한 불꽃이 휘황찬란하다. 사람들의 박수와 웃음이 터지고 호스트들이 장내를 한바퀴 빙 돌아 본인이 서빙하는 테이블까지 왔을 때 불꽃은 사그라지고 불이 켜졌다.

  호스트가 왼손에 들었던 것은 후식인 케이크였다. 호스트는 정성스레 케이크를 잘라 접시에 담아준다. 여행은 달콤한 케이크 맛이라고 암시라도 하듯 맛있고 달콤한 케이크가 입 속에서 녹는다. 때론 유치할 수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때론 유치한 줄 알면서도 빠져들 수 있음이 얼마나 종합비타민 같은 삶의 활력인지. 고급스런 분위기와 우아함과 정중함이 벗겨진 만찬장은 떠들썩하고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로 격식의 옷을 벗는다. '유치찬란만세' 라도 부르고 싶은 피나래 이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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