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들이 한국여성과 사랑에 빠졌어요

2003. 5. 18 일요일. 맑음(여행 15일째날)

에피다브로스-스파르타-미스트라, 중행거리 177㎞

  오늘은 나프플리온을 거쳐 스파르타와 미스트라까지 갈 예정이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서는데 호텔 앞 교회에서 종을 친다. 오늘은 일요일. 둔탁하고 거친 종소리지만 온 마을이 잠에서 깰만큼 오래도록 울린다. 불편한 밤을 보낸 위로로 그리스 정교회가 종소리를 들려 주나보다. 마을을 벗어나 산을 넘는데 다리 유적표시가 있었다. 차를 세우고 유적이 있는 산으로 오르다 나무숲에 앉아있는 양치기를 만났다. 양떼를 돌보고 있던 양치기가 갑자기 나타난 동양인을 보고 천진하게 웃는다. 양치기에게 인삼사탕을 드리고 사진 한 장을 찰깍. 양떼들과 머리에 수건을 두른 수염 가득한 양치기와 무너질 듯 오래된 다리와 …. 잘 가라고 손 흔드는 양치기의 새까만 눈동자가 가슴에 박힌다. 우린 언제쯤 저런 눈빛을 가졌었지.

웃고 있는 순진한 양치기 아저씨와 함께

멀리 보이는나프플리온의 브르지 섬

  고대 아르골리스 지방 수도였던 항구 도시 나프플리온까지 왔다. 어느 도시나 볼거리는 올드타운에 있고 유적은 모두 언덕 위에 있다. 나프플리온의 볼거리 1호인 팔라미티 성터는 1711∼1714년에 축조된 성으로 터키 지배 시대 엔 정치범의 감옥으로 사용됐던 곳인데 성까지는 999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우린 멀리서 사진만 찍고 항구에 면한 올드타운의 부둣가 로 갔다.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3사람이 한팀이 되어 하는 낚시는 산 꽁치를 미끼로 쓴다. 두 사람은 낚시줄을 잡고 한사람은 갈고리를 들었다. 제법 큰 고기가 잡히나보다. 미끼인 꽁치가 힘차게 유영하며 바다로 나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낚시꾼은 찌를 주시한다. 방울소리가 울리고 찌가 흔들리면 두 사람은 낚시줄을 번갈아 잡아당기고 갈고리를 든 사람은 요동치며 끌려오는 고기를 따라 바쁘게 움직인다. 부두 가까이 끌려온 고기를 휙 낚아채는 순간 그만 줄이 끊어지고 1m가 넘는 고기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아∼ 아쉬운 순간. 번번이 눈앞에서 고기를 놓치는 낚시꾼의 아쉬움 못지않게 멋진 장면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우리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긴장과 김빠짐이 계속된다. 10살쯤 된 아들과 같이 온 아버지도 열심히 꽁치 등허리를 묶어 바다로 내보내고 아들은 아버지와 호흡을 맞추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제 역할을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하모니가 결실을 맺는 멋진 장면을 보지 못한 채 우린 나프플리온 서민들의 일요일 풍경을 뒤로하고 스파르타로 떠났다.

  해변을 낀 나프폴리온의 드라이브 코스는 나무와 숲으로 우거져 있어 오픈카 드라이버 캡틴 정이 푸른 바다와 초록빛 숲을 즐기며 해안가 도로를 드라이브를 한다. 푸르름은 나그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큰 보너스다. 트리폴리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내륙으로 들어가면서 풍경은 180˚로 바뀌고 메마르고 황량한 석회암 돌산이 첩첩이 겹쳐진다. 생명이라곤 없을 것 같은 척박한 악산이다. 맨살 드러낸 악산의 좁고 휘어진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길은 오르다 보면 꺾이고 다시 내려오다 굽이쳐 오르기를 반복한다. 이런 삭막한 산 속을 한 시간 달리는 것은 고속도로 서너 시간을 달리 것 보다 더 힘들고 지친다. 끝날 것 같지 않은 황량함은 죽음의 길 같아서 으스스 한기까지 느껴진다. 깊고 푸른 설악산이 얼마나 그리운지. 이리저리 휘어 자란 운치 있는 소나무가 있는 한계령 고갯길이 얼마나 생명있는 풍경인지. 그리스 여행 열 하루짼데 이런 지독한 악산은 처음이다. 빨리 벗어나고 싶다. 지나가는 차라도 있었으면….

  자연은 끝이 없다. 트리폴리가 가까워지면서 산이 서서히 푸른 옷으로 갈아입더니 스파르타 가는 길로 접어들자 펀펀한 구릉지대의 무성한 숲과 녹음이 긴장을 풀어준다. 12시가 지나서 스파르타에 도착했다. 도시는 잘 정비된 깨끗한 거리와 푸른 가로수와 쇼윈도의 세련된 상품들과 중앙광장의 화려한 장식들이 너무도 현대적이다. 엄격한 교육의 대명사 스파르타 교육으로 뇌리에 꽉 박힌 스파르타에서 휴일을 즐기는 시민들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보며 엄격했던 옛날의 기상을 느껴보려는 나그네의 성급한 마음이 슬그머니 뒷걸음친다.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얘기는 역사책에나 있는 법. 우린 다운타운을 빙빙 돌며 문을 연 타베르나를 찾았다. 날씨가 무지 더워서 찬 콜라와 부드러운 샌드위치를 그늘 벤치에서 먹으며 스파르타의 현재와 과거를 한 줄에 꿰어본다.

  여행에서 숙소 정하기는 생명과 같다. 숙소부터 정하기로 하고 6km 떨어진 미스트라로 갔다. 수영장과 넝쿨장미와 갖가지 꽃들이 핀 넓은 정원과 산 정상에 우뚝한 미스트라 유적이 보이는 캠핑사이트가 마음에 들었고 일박에 30유로다. 해질녘 숙소를 찾아 헤매는 초조함과 서글픔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마음으로 스파르타 유적을 찾아가는 길에 올리브박물관이 있었다.

스파르타에 있는 올리브 박물관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상

  몇 천년의 그리스 역사와 같이한 올리브 열매. 질 좋은 올리브 열매와 기름은 포도주와 함께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국력으로 이어졌다. 스파르타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 중에서 영역이 광대하고 땅이 비옥하여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리스 제일의 육군을 가진 강국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위의 무성한 올리브나무가 그 사실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박물관은 시에스타 시간이어서 문이 닫혀있었고 갖가지 포스터가 유리창에 붙어있어서 내부가 보이질 않았다. 작고 아담한 올리브 박물관을 보지 못하고 떠나는 마음이 섭섭하다. 하여튼 이번 여행은 박물관과 인연이 없다니까.

폐허가 된 스파르타 유적

 

도심 외곽 조금 높은 언덕에 있는 스파르타 유적은 올리브나무 숲에 둘러 쌓인 말 그대로 페허였다. 아테네와 쌍벽을 이룬 막강했던 도시국가 스파르타의 영화는 발굴도 복원도 멈춘 채 조용히 숨어있어 유적터를 찾은 나그네의 허망한 눈길만이 유적 위를 나르는 한 떼의 새 무리를 따라 허공을 쫓는다. 휘∼ 올리브나무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이 식고 숲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바람 빠진 공처럼 페허 위에 앉아있다. 갓난아이를 포도주로 씻길 때 경련을 일으키면 허약한 아이라고 산에 버렸고 전사한 아들 시신의 상처가 몸 앞쪽에 많으면 싸우다 죽은 장렬한 죽음을 인정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조상의 묘에 묻고 뒤쪽에 많으면 도망치다 죽은 비겁함에 공동묘지에 묻었다는 그 무섭고 엄격한 스파르타 정신은 현대인의 삶 어디에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을까?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툴툴 털며 일어서는 등뒤로 저무는 햇살이 부드럽게 비취고 있었다.

  캠핑사이트로 돌아왔다. 독일 캠핑카 족들이 떼로 들어와 사이트의 빈자리가 모토홈으로 꽉 찼다.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독일여행객들을 많이 만난다. 캠핑카 족과 수학여행 온 학생들과 어린아이를 동반한 젊은 부부 등. 유로화가 달러보다 강세고 선호도도 좋아 유럽사람들은 여행하기가 한결 수월할 것 같다. 저쪽에서 텐트를 치고 있는 가족들도 독일사람들이다. 앞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도 스스로 공부하며 준비하고 떠나는 모험과 도전이 있는 가족단위의 자유여행을 많아했으면 하는 바람을 해본다.

미스트라의 캠핑장. 여주인이 친절하다

캠핑장을 메운 독일인들의 모터홈

  캠핑사이트의 주인여자가 우릴 반긴다. 우리 오두막은 사무실 바로 옆인데 수영도 하고 밖에서 저녁식사도 하라며 의자와 테이블을 가져다준다. 아마도 우리가 이 캠핑사이트에 온 첫 한국사람인가 보다. 주인여자의 친절에 합죽선 부채와 인삼차를 선물로 주었다. 그녀는 숙소를 정할 때 제시한 여권을 보고 우리가 한국사람이라는 걸 알로 있었다. 주인여자는 지갑에서 두 아들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그리스 조각같이 반듯하게 잘 생긴 뉴욕에 유학중인 큰아들은 27살인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는 미스 홍이라는 한국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며 내 눈을 본다. 큰며느리가 될 지 모를 한국아가씨를 사진으로만 봤다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곤 자상하고 공부 잘하는 큰아들 자랑에 얼굴표정이 다시 살아난다. 뜻밖의 얘기에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얼른 서울서 가지고 간 작은 사진첩을 보여줬다. 집안행사 때 온 가족이 한복을 입고 찍은 가족사진과 설악산, 경주, 창덕궁 등 한국적인 사진들을. 그리고 한국도 그리스처럼 역사가 깊고 예절바른 나라라고 말해주었다. 주인여자는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 눈치였으나 내 영어실력이 빤해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은 어두워졌고 산 정상에 '비잔틴의 페허'라 부르는 미스트라 성채가 조명등 불빛에 신비한 실루엣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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