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살로니케의 떠돌이 개와 불가리아 로젠스키 수도원

2003. 5. 23 금요일. 비(여행 20일째날)

테살로니키-멜닉, 주행거리 162㎞, 주유량 9.35ℓ, 금액 EUR6.90-

  날씨가 춥고 바람이 몹시 불더니 급기야 세찬 비가 내린다. 이런 험한 날씨는 처음이다. 비는 여행의 천적인데. 아침7시 호텔을 나섰다. 다운타운에 있는 소피아 교회 근처 길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교회 앞에서 성호를 긋고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등교하는 초등학생들을 우산 씌워 데려다 주는 엄마의 모습이 테살로니케의 아침풍경이 된다. 우린 소피아교회서부터 테살로니케 답사를 시작했다.

  소피아교회는 돔 내에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비잔틴 시대 작품 그리스도 승천 모자이크가 유명하다. 8시전인데도 교회에 온 사람들이 교회를 돌며 기도를 올린다. 검은 옷에 검은 스카프를 쓴 할머니는 가는 초를 사서 불을 밝히고 성화에 키스를 하고 무릎을 굽혀 절을 한다. 검은 옷차림의 젊은 여인도 할머니와 똑같이 교회를 돌며 키스와 절을 한다. 바쁜 출근길의 남자는 굵은 초 몇 개를 밝히고 급히 키스와 절을 하고 나간다. 우리가 교회를 돌아보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들락거림이 많다. 각자가 초를 밝히고 성화 앞에서 혼자 묵상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더 경건해 보인다.

  테살로니케 상징인 화이트 타워로 갔다. 15세기 베네치아인이 세운 방어벽의 일부로 긴 역사를 거치면서 지금은 비잔틴 박물관이 되어 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아서 내부보기를 포기하고 에게 해를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떠나려는데 들개 한 마리가 다가온다. 비는 점점 더 쏟아져 바지자락이 흠뻑 젖었다. 등짐을 메고, 카메라와 책은 들고, 우산을 쓰고 치덕치덕 걷는 우리 뒤를 새끼 송아지 만한 큰 덩치에 검은 털이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개가 따라온다. 사람들이 모이는 유적지에는 언제나 개나 고양이가 먼저 관광객을 맞아주는데 아직 일러서 아침을 얻어먹지 못했나보다. 줄게 아무 것도 없어서 미안했다. 비만 아니면 빵이라도 넣은 가방을 메고 나왔을 텐데.

  갈레리우스 개선문 쪽으로 가는데 그놈이 계속 따라온다. 우리가 건널목에 서면 그놈도 따라선다. 길을 가로 질러가면 그놈도 가로질러 온다. 남편이 비디오카메라로 뭔가를 찍을 땐 남편 뒤에 앉아 있다가 우리가 움직이면 그놈도 움직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보고 웃기도 한다. 동양인 나그네와 노숙견의 이상한 동행을 보고. 복잡한 곳에선 얼른 차도로 내려섰다가 다시 보도로 올라와 따라온다. 줄기차게 따라오는 그놈은 아무래도 델포이에 놓고 온 확대경의 화신인가보다. 산 속에서 며칠 밤을 보냈을 확대경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찡하다. 확대경과 그놈의 얼굴이 겹쳐져 비오는 구질 맞은 날씨에 마음까지 우울해지려한다.

  돌아보니 그놈이 남편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온다. 무슨 인연일까. 건널목에 섰다. 신호동이 바뀌며 사람들이 우르르 길을 건넜다. 그놈이 빗물에 젖은 오른쪽 눈을 박박 긁는 사이 얼른 인파 속에 숨어 길은 건너 왼쪽으로 숨었다. 사람들이 시내방향인 오른쪽으로 간다. 급히 길을 건넌 그놈이 두리번거리며 우릴 찾더니 사람들이 많이 가는 오른쪽으로 빗물을 튀기며 뛰어간다. 휴∼ 벗어났다. 그놈의 스토킹이 30분간이나 계속되었으니. 그러나 또 마음이 찡해온다. 노숙견이 자기의 근거 화이트 타워에서 너무 멀리 온 것 같아서 빨리 돌아가게 할 마음으로 먹을 것을 안 준 게 후회됐다. 빵이라도 사 줄 걸….

  개선문은 로마군이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330년에 세운 문이다. 표면의 부조는 전투장면과 진두지휘하고 있는 황제와 병사들 그리고 전차와 말들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17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지금에 이른 개선문이 테살로니 케 역사를 말하는 것 같다. 알렉산더 대왕의 고향 마케도니아의 중심 테살로니케. 개선문이 서있는 이 거리는 옛부터 동서교역의 간선도로였다니 알렉산더 대왕도 이 거리를 통해 동방원정 길에 오르지 않았을까. 알렉산더 대왕 군사들의 행군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리스 최대 교회인 디미트리오스 교회

 

개선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개선문과 함께 테살로니케에서 제일 오래된 건축물 로톤다가 있었다. 이곳도 복원중이였는데 학자들과 건축시공자들이 부조가 새겨진 돌덩이들을 놓고 진지하게 토론을 벌리고 있었다. 88올림픽을 앞둔 때의 우리처럼 그리스도 국제사회에서의 업그레이드를 꿈꾸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스 최대의 교회 디미트리오스 교회로 가는 길은 포석이 닳아서 비에 미끄럽다. 우린 이 교회를 끝으로 16일 간의 그리스 여행을 끝냈다. 줄기찬 빗속에 '미친년 널뛰듯' 돌아본 테살로니케의 아쉬움을 접고 다시 불가리아로 들어가기 위해 11시 30분쯤 국경으로 출발했다.

   2시간만에 국경에 도착했고 30분만에 그리스-불가리아 국경을 통과했다. 보름만에 다시 제집에 온 오픈카가 가쁜 숨을 멈춘다. 노구(老軀)로 거친 그리스 땅을 잘 달려준 오픈카가 고마웠다.

  휑한 들판에 서있는 두나라 국경체크포인트인 초소. 국경이란 말은 내겐 여전히 예민한 말이다. 휴전선이 진정한 국경인가, 아닌가. 나에게 국경이란 말은 끝, 더 갈 수 없는 막힘, 철통, 단절, 되돌아옴, 이런 단어가 연상된다. 그리스-불가리아 국경을 넘는데 30분 걸렸다. 우리의 국경 아닌 국경 휴전선은 50년이 흘러도 아직 넘지 못하고 있다. 서울, 평양, 금강산에서 만난 이산가족들이 울고, 부둥켜 앉고, 절하고, 웃고, 춤추고 그리고 다시 지상의 국경(?)을 넘지 못하고 비행기나 배로 다시 돌아선다. 비 뿌리고 구름이 낮게 깔린 국경의 풍경이 우리의 현실을 연상시켰나보다. 세상엔 이렇게 다양한 환경과 다양한 가치와 다양한 삶들이 있어서 우린 숨은 보석 찾기 하듯 세상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세상 들여다보기를 한다. 여기서 멜릭마을까진 30km다. 오늘은 멜릭에서 자고 내일 스몰얀으로 떠날 예정이다. 16일만에 다시 보는 불가리아의 농촌풍경이 멜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상기시킨다.

  멜릭마을에도 비가 많이 왔나보다. 산사태로 토사와 진흙더미가 길을 덮어 엉망이다. 처음 왔을 때와는 달리 마을이 어수선하고 뒤죽박죽이다. 호텔 멜릭에 방을 정하고 로젠스키 수도원을 찾아갔다. 마을에서 6km 정도 들어가는 수도원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흙탕물과 진흙은 뒤집어 쓴 차가 로젠 마을을 지나 수도원에 도착했을 땐 비가 개였다. 작은 수도원이 구릉 위에 조촐하게 있었다. 구릉과 구릉이 완만히 겹치는 부드러운 곡선 위에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들과 푸른 목초지와 비 갠 하늘의 상큼함이 그리스의 척박한 땅을 고단하게 달려온 나를 감싸준다.

  수도원의 낮은 나무담은 빗장으로 잠겨있고 개조심하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담 안엔 검둥이가 누워서 시큰둥하게 쳐다본다. 외진 곳을 지키는 파수꾼은 어디나 개들이지만 수도원에 붙어있는 개조심 팻말은 어쩐지 재미있다. 못생긴 하얀 고양이가 나타나 낯선이를 보고 야옹거리고 오밀조밀 꾸며 논 담밑 정원에서 닭과 토끼들이 푸성귀를 뜯고 있다. 작은 출입문이 있었다. 2레바를 넣으라고 써붙인 나무함에 동전 두 개를 넣고 낡은 나무대문을 들어서니 그레고리안 성가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너무나 소박한 작고 수수한 로젠스키 수도원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나도 모르게 고개 숙여 나를 낮춘다.

 

멜닉 마을 인근의 로젠스키 수도원

수사들의 방이 있는 목조 회랑

 작은 마당에 얼기설기 세워논 지지작대기를 따라 포도넝쿨이 푸르게 뻗어있고 쪼그만 교회와 3층 목조 사제관이 있었다. 삐꺽거릴 것 같은 나무계단에 '올라오지 마세요'라는 종이가 새끼줄에 매달려 있다. 무채색의 수도원에 포도넝쿨의 연초록빛이 영롱하고 교회 안의 빛바랜 프레스코화는 수도원의 역사를 말하는 듯 하다. 성가를 들으며 마당에 서있으니 비갠 하늘처럼 심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3층에서 검은 제의에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젊은 수도사가 얼굴을 내민다. 동양인인 우릴 보고 미소만 짓고 들어간다. 집을 떠난 지 20일째이다. 이제 겨우 여행 1/5이 지나고 있다. 마음 밑바닥에 고인 힘듬과 집에 대한 그리움을 조용한 수도원이 품어준다. 집에 돌아온 듯 편안해지는 마음. 호텔로 돌아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나는 언덕아래까지 와 차 트렁크에서 선물을 꺼내들고 다시 수도원으로 올라갔다. 올라오지 말라는 새끼줄 밑으로 살금살금 올라가 3층 복도에 태극선 부채와 홍삼차 한곽과 홍삼 사탕과 목거리 볼펜 몇 자루를 놓고 나왔다. 떠나는 마음이 조금 가볍다. 소박하고 꾸밈없어서 오히려 마음에 깊게 와 닿은 로젠스키 수도원. 저녁빛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포도주를 만들어서 파는 집이 있었다. 2레바를 주고 포도주 한병을 샀다. 향과 맛이 좋았다. 포도주를 마시며 호텔 멜릭에서의 두 번째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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