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로피 산맥의 고산 마을 시로카루카

2003. 5. 25 일요일. 맑음(여행 22일째날)

데빈-시로카루카-베리코 타르노바, 주행거리 308㎞, 주유량 21.43ℓ, 금액 LEV30.00-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잤는데도 추워서 뒤척였다. 고산지대 산간마을은 낯과 밤의 기온 차이가 꽤 컸다. 아침에 일어나 지도를 보니 시로카루카가 여기서 멀지 않았다. 잃어버린 쫄병만 있었어도 호텔을 찾느라 그렇게 애타지 않았을 텐데…. 찬란한 아침 햇살이 쭉쭉 뻗은 나무사이로 습기 먹은 공기를 뚫고 비친다. 아∼ 이 신선함, 촉촉함, 상쾌함이여…. 맑고 투명한 아침햇살이 어제의 고생을 잊게 한다. 어제 내린 비로 계곡의 물은 넘쳐흐르고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하늘을 찌른다. 조림사업으로 미끈하게 자란 엄청난 자산인 목재들이 부럽다. 상쾌한 아침의 생기가 원동력이 된다. 산허리를 잘라 낸 좁은 길을 물소리를 들으며 달린다.

  시로카루카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요일이어서 인포메이션 센터도 문을 닫았다. 온통 산림에 쌓인 마을은 조용했고 마을 회관 앞 의자에 남자 노인들이 아침햇살을 쪼이고 앉아있었다. 계곡에 음악학교가 있는데 규모가 제법 컸다. 산골 작은 마을에 ⓘ 도 있고 호텔도 있고 음악학교도 있는 걸 보니 이 마을에 뭔가가 있긴 한가보다. 마을은 우리 나라 너와지붕처럼 납작한 돌로 기와를 얻은 전통가옥이 대부분이고 산기슭을 따라 경사면에 지은 집들은 아래층은 가축의 축사로 쓰고 있어서 가축의 분뇨냄새가 심하게 났다.

장수 마을인 시로카루카 마을의 전통 가옥

시로카루카의 가정집에서

  마을을 이리저리 돌다가 긴 나무의자에 앉아 있는 세 할머니를 만났다. 홍삼차와 홍삼사탕을 드리며 옆에 있는 집이 할머니 집이냐고 물었다. 할머니가 "다다" 한다. 내가 손짓으로 집을 볼 수 있냐고 했다. 또 "다다"하며 내 손을 잡고 일어난다. 할머니가 데려간 곳은 쓰러질 듯 얼기설기 나무로 만든 퍼세식 화장실이었다. 들어가란다. 내 표정이 볼일이 급한 사람처럼 보였나보다. 웃었더니 자꾸 들어가란다. 바디랭귀지가 이렇게 안통할 수도 있었다. 한바탕 웃고 우린 그 자리를 떠났다.

  장수마을의 생활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참 막막했다. 다시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동네를 기웃거린다. 그러나 가축의 오물냄새 뿐 사람이 없다. 돌아 내려오는데 텃밭을 만지고있는 두 여인이 있었다. 젊은 여인에게로 다가가 태극선 부채를 건네주며 한국에서 왔는데 당신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다다"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들어오란다. 마음이 통했나 보다. 두 여인은 모녀였다.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살고 있는 여인의 집은 시로카루카의 전통가옥이 아니라 좁지만 2층으로 된 마을에선 비교적 현대(?)적인 가옥이었다. 12살 된 큰아들이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비좁은 집의 식당을 겸한 부엌엔 무쇠난로가 윤나게 반들거렸고 작은 거실엔 소파와 TV가 있었다. 요구르트 한 대접을 준다. 시큼한 요구르트를 천천히 먹자 산딸기잼을 병째 같다주며 섞어 먹으란다. 모두 홈메이드다. 알고 싶고 궁금한 게 많았지만 의사소통이 안돼 답답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의 삶은 최소한의 생활도구와 빵과 요구르트, 감자 등을 주식으로 하는 소박한 식생활과 단순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4살박이 손주서부터 할머니까지 모두 똑같이 천진한 얼굴표정을 하고 있다. 이 가족은 물론 조금 전에 만난 할머니 3분도, 해바라기하고 있던 할아버지들도 모두 똑같다.

  멜릭마을 보다 더 순박한 시로카루카 사람들. 우린 이 가족에게 한국민예품과 목거리 볼펜 등 선물을 주었다. 그곳을 떠나려는데 온 식구가 나와 손을 흔들어 준다.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던 한시간이 어제 목숨을 건 지독한 고생의 열매였다. 마을로 내려오니 여전히 노인들이 ? 센터 앞에 앉아있다. 저런 천진한 모습을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시로카루카 마을은 내 마음속에 아름다운 한편의 수필로 깊이 새겨진다.

  12시 시로카루카 마을을 떠나 불가리아 제2의 도시 블로브디프로 향했다. 산간지대의 외로운 달리기를 계속한다. 경관이 좋은 곳엔 레스토랑도 있고 나들이 나온 가족들도 많다. 우리의 양평 카페촌 같이 제법 자본주의 냄새가 난다. 오후 2시도 넘었고 시로카루카 마을의 여운도 은은해서 점심식사를 하러 식당엘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음식을 즐기고 차를 마시고 레스토랑을 나설 때까지 2시간을 보냈다. 영어판 메뉴도 없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어서 애를 먹었다.

  이곳은 산간지대지만 대부분의 불가리아 땅은 넓고 비옥한 평원이어서 농업과 낙농이 발달한 국가이다. 그래서 급하고 서둘 필요 없는 느긋함이 깊은 종교적 뿌리 속에 녹아있어 매사 여유롭고 태평이다. 쌀요리와 사라다, 소고기에 야채를 넣고 끊인 스튜를 주문했는데 향신료가 입에 맞지 않았다. 닭 바비큐를 다시 시켰다. 바쁜 나그네는 음식맛을 즐기며 2시간씩 점심식사를 할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갈길이 멀고 잘곳을 구해야하고 그리스에서 늘어진 일정은 예정보다 3일이나 지체됐다. 우린 다시 달렸다. 여전히 길은 엉망이고 공기는 달콤하고 계곡의 물소린 시원하고 조림이 잘 된 울창한 산림은 부럽고 또 부럽다.

  캡틴 정은 블로브디프를 보고 불가리아 고도(古都) 벨리코타르노브까지 가자고 한다. 벨리코타르노브는 우리 나라 경주 같은 곳이다. 오후 3시가 넘었는데 불안했다. 어제 산 넘는 일에 질려버린 나는 산맥 중간쯤에 있는 장미계곡 카잔륵에서 잤으면 했으나 늦어진 일정을 보충하기 위해 베리코타르노브까지 가자는 남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또 비가 뿌린다. 워낙 고도가 높은 곳이라 날씨변덕이 심하다. 블로브디프까지는 큰 도시여서 어제처럼 홀로 달리는 두려움이 없어서 좋았다.

  여행은 꼭 백조 같다. 유유자적하며 주류천하하는 신선놀음이라고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그러나 내면엔 주유천하를 위한 치밀하고 치열한 준비와 계획과 저지르는 용기와 무모하리만치 돌진하는 모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여행은 우아하게 떠있기 위해 물밑에서 쉼없이 두발을 움직여야하는 백조 같다. 그러나 여행의 참 맛은 돌아와 두고두고 꼽씹을수록 살이되고 피가되는 열린 의식과 강한 자신감이다. 자신을 키워주는 걸진 터가 되고 강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불가리아 제2의 도시 블로브디프 시내를 돌아보고 벨리코타르노보로 향했다. 베리코타르노보는 큰 도시여서 이정표가 키릴문자가 아닌 영문표기로 되어 있다. 눈이 번쩍 뜨인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온 기분. 잃어버린 쫄병을 찾은 것 같은 기분. 여행을 하다보면 별 것 아닌 것에서 힘이 빠지고 하찮은 것에서 기운을 얻곤한다. 장미계곡인 카잔륵서 부터 산길을 오른다. 두 대의 대형 트레일러가 앞을 막고 있어서 사행길에서 마음만 바쁠 뿐 시속 30km의 저속으로 산을 넘는다.

  저녁 7시 넘어 벨리코타르노브에 도착했다. 산지에서 큰 도시로 나오니 도시의 번잡함이 반갑다. 다운타운에 위치한 호텔도 고층이어서 멀리 성채와 이곳 특유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린 내일 루마니아로 들어간다. 끝없는 방랑의 고달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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