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

2003. 5. 27 화요일. 맑음(여행 24일째날)

부쿠레슈티

간밤에 호텔 밖에 세워둔 오픈카의 경보음이 울려서 혹시 도난사곤가 하고 깼다 잤다 하느라고 잠을 설쳤다. 고물차 오픈카까지도 도난사고에 대비해 경보장치를 부착해 놓았으니 루마니아의 대외 신인도를 알만했다. 하루쯤 푹 쉬고 싶다. 그러나 늦어진 일정 때문에 다시 일어났다. 큰 도시에선 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쉽게 시내에 숙소를 정한다. 부쿠레슈티 호텔은 별3짜리 호텔로 겉보긴 멀쩡한데 내부는 엉망이어서 다른 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화장실 휴지까지도 민망할 정도다. 그래도 차를 관리해 주어 다행이었다.

  이 도시의 중앙로인 마게루거리로 나갔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문을 닫았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휴관이다. 루마니아도 박물관과 인연이 없다. 그러나 역사 박물관을 개관을 했고 입장료는 무료다. 박물관의 무뚝뚝한 중년여인이 촬영이 금지된 내부를 찍을까봐 우릴 졸졸 따라다닌다. 별로 볼거리도 없는 박물관은 번듯한 외형에 비해 내실은 빈약했고 획일화된 전시가 어딘지 썰렁했다. 아직도 남아 있은 사회주의 잔재 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부쿠레슈티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도시였고 대도시에서 느끼는 혼잡속의 활기나 엉킴속의 다양함이나 무질서 속의 진취적 생기는 찾아보기 힘든 정체된 듯한, 거대한 몸집이 부담스러워 보이는 인상의 도시였다

부크레슈티의 활발한 생활 모습

18세기에 세원진 크레툴레스쿠 정교회 성당

 이 도시의 기원인 2000여년전 교역로로 생긴 마게루 거리는 지금도 부쿠레슈티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의 중요건물들이 이 거리에 있고 국립극장과 오페라하우스가 있는 대학광장 주위엔 젊은이들이 모이는 카페와 레스토랑과 아이스크림 가게와 분수 등 자본주의 냄새가 나는 쾌적한 휴식공간이 잘 정비되어 있다. 그러나 바로 옆 널찍한 지하철 입구의 에스컬레이터는 움직이지 않고 지저분한 지하공간엔 지린내가 배어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표정하고 낡은 차들이 도로를 달린다. 이 마게루 거리 한가운데 작고 조촐한 기념물이 있다. 1989년 12월 피의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 거리에서 희생된 시민들을 추모하는 기념물이다. 한송이 꽃이 외롭게 놓여있다.

  대학광장 옆 오픈 레스토랑에서 한 무리의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출장 온 회사원들과 교회 일을 하고 있는 교민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도로를 달리는 새차들 중엔 우리의 대우차가 제법 많다. 루마니아에 대우자동차 공장이 있어선가 보다. 디자인이나 색상, 품질 면에서 경쟁력 있는 우리 차들이 기특하고 자랑스럽다. 제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옛말처럼 우리 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

혁명전의 대통령궁, 지금은 상원 건물

상원 건물 앞의 혁명 기념 조형물

  식사 후 혁명광장이 있는 빅토리에 거리로 갔다. 이 거리는 격동의 루마니아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공화국 미술관은 문을 닫았고 광장 앞 18세기에 지은 크레툴레스쿠 정교회 성당에는 변함없이 기원하는 사람들의 촛불이 밝혀져 있다. 건너편 차우셰스쿠 시절의 궁전이었던 상원(上院) 건물엔 루마니아 국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이곳에도 1989년 12월 시민혁명 때 대통령궁 앞에서 희생된 시민의 추모비와 혁명기념물이 있다. 궁전 건물 벽엔 여기저기 탄흔자국이 남아 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던 1989년 12월 시민혁명과 대통령궁 옥상에서 헬리콥터로 탈출하던 차우셰스쿠, 잡혀와 감금되던 장면, 그리고 처형된 후 시신이 공개된 사진 등 매스컴을 통해 전해오던 격동의 루마니아 현대사가 눈에 선하다. 15년이 흘러 그 현장에 와 있는 감회가 가슴 벅차다. 아직도 루마니아는 그 상처가 아물지 않은 듯 어수선하고 뒤죽박죽인 느낌이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니까.

  부쿠레슈티는 숲과 공원이 많은 도시로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조용하고 한적하다. 호텔까지 뒷길로 걸어오면서 시골스러운 도시의 이면을 본다. 덩그렇게 크기만 했진 어설프고 낡아빠진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바이오 리듬이 다운되는 날인지 자꾸 늘어진다. 위로를 받고 싶어서 서울로 전화를 했다. 가족들의 목소리가 한잔의 생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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