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를 그대로 살고 있는 시기슈아라

2003. 5. 29 목요일. 맑음(여행 26일째날)

시기슈아라-클루지 나포카, 주행거리 177㎞, 주유량  28.85ℓ, 금액 LEI600,000-

 호텔의 아침식사도 훌륭했다. 그동안 고팠던 커피도 두잔이나 마셨다. 속삭이듯 말하는 루마니아 주인남자의 회색 눈빛이 로맨틱하다. 우리가 떠날 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는 정스러운 루마니아 사람들이다. 이 호텔의 옆집도 가정집을 개조하여 작은 호텔로 만들고 있었다. 루마니아가 여기저기서 사회주의 옷을 벗고 있었다. 다운타운으로 가는 길은 옛길 그대로여서 마차가 지나다니던 울퉁불퉁한 포석 깔린 길은 중세풍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있는 마을의 중심지까지 이어진다.

  중세 루마니아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 손대지 않은 옛것 그대로를 고스란히 간직해온 마을이 시간을 멈춘 채 숨을 쉬고 있었다. 21세기에도 이런 분위기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는 게 소중하고 보배롭다. 작은 언덕 정상엔 14세기에 건축된 박물관이 된 시계탑이 있고 성체를 빙 돌며 높다란 성벽에서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면 오래되어 쇠락한 붉은 기와지붕들이 얼기설기 연이어 붙어있다. 시간마다 울리는 시계탑의 종소리가 마을 아래로 퍼져간다.

시기슈아라의 박물관이 된 시계탑

드라큐라 백작의 생가, 지금은 식당

  성안은 시계탑을 중심으로 광장이 있고 광장에 면한 드라큘라 백작의 부친이 살던 집(1431∼35년)이 있다. 드라큘라 백작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이 집은 카페가 되어있었다. 광장 옆으로 산상교회가 있고 교회 옆엔 옛 타운 홀이 있다. 좁고 구불거리는 언덕길은 마차가 다닌 흔적이 역력한 패인 포석들이 반들거린다. 검은 모자에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마차에서 내리는 드라큘라 백작을 상상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나를 상상해보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성채의 옛 분위기는 모두를 중세로 끌어들이다. 현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시기슈아라가 지금 우리와 같이 숨쉬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광장주위로 중세풍 마을을 그린 그림과 드라큘라 백작을 그린 기념품을 파는 가게와 노점상들이 관광객 마음을 붙잡는다. 박물관이 된 시계탑에서 헝가리 혈통의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과 선생님을 만났다. 코리안이라고 하자 반갑다며 사진을 찍자고 한다. 환하게 웃는 아이들이 순진하다. 선생님의 설명을 열심히 듣는 아이들. 지금을 루마니아 인이지만 자신들의 뿌리는 헝가리와 헝가리 문화라는 것은 잊지 않으려는 모습이 진지하다. 그 옛날 이곳은 헝가리 영토였다. 사람은 정신으로 사는 동물이라 했던가.

  성 아래로 내려와 종소리를 들으며 마을의 작은 공원에 앉아 쉬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을 본다. 순박한 표정의 루마니아 사람들.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내 얼굴을 본다. 검게 탓지만 화장기 없는 얼굴이 조금은 이들을 닮아 가고 있는 것 같다. 남편의 얼굴을 본다. 남편의 얼굴도 찌든 때가 벗겨진 듯 편안하다. 루마니아에 대한 편견도 조금씩 벗겨진다. 그리고 루마니아에 정이 들기 시작한다. 중세풍의 마을 시기슈아라가 천연의 보석처럼 내마음 속에 각인된다. 멜릭 마을의 로젠스키 수도원처럼.

  주차 시간을 오버했는데도 순한 표정의 수금원은 레이를 더 내라는 말없이 우릴 보내 준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우린 클루지 나포카로 떠났다. 클루지 나포카로 가는 길의 구릉지대 평원이 하도 넓어서 남편은 나폴레옹 전쟁영화가 떠오른다고 했다. 이쪽 산등성이와 저쪽 산등성이에 진을 치고 저 아래 평원을 향해 나팔을 불며 진군하는 전쟁모습이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평원을 보니 이해가 된다고. 산이 아닌 구릉과 평야가 야트막히 이어져서 이 끝에서 저 끝이 환히 보이는 전원풍경에 감탄이다, 부럽다를 연발하며 우린 달린다. 이렇게 달릴 때가 제일 편하다. 큰 도시에 가까워지면 지독한 통행세 때문에 지치게 마련이니까.

  클루지 나포카 20km 전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다. 잘생긴 주유소 청년이 한국을 안다며 미소짓는다. 대체로 루마니아 남성의 웃는 모습은 무공해 같다. 청년에게 세차 좀 할 수 없겠냐고 물었더니 저 건물 안에 수도가 있다고 했다. 불가리아 시로카루카로 갈 때 진흙을 뒤집어 쓴 오픈카가 꼴사나웠었다. 홍삼사탕과 민예품 꼬마 장구를 청년에게 주었다. 루마니아의 그 많은 마차보다도 더 더럽던 오픈카가 말끔해 졌다. 내가 목욕한 것처럼 개운하다. 휘파람이라도 불 듯 기분 좋게 주유소를 떠났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세찬 비가 퍼붓는다. 도로변 파킹장에 차를 세웠다. 넓은 평원만큼이나 비도 무지막지하게 쏟아진다. 30분 이상을 기다리니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어김없이 통행세를 내고 찾은 별3짜리 호텔은 페르시아 풍의 색상과 분위기, 객실의 공간이 넉넉했다. 그러나 인테리어는 아직 수준 미달이다. 이런 미숙함이 루마니아의 발전가능성으로 보인다. 우린 이 넓은 방에서 이틀 밤을 보낼 예정이다. 홈바에서 백포도주 한병을 꺼냈다. 포도주가 부드럽게 마른 목을 적셔준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루마니아에 대해 걱정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훈훈한 인정이 있게 마련인 것을. 루마니아가 점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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