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다비아 부코비나 지방의 수도원을 찾아서

2003. 5. 31 토요일. 맑음(여행 28일째날)

클루지 나아포카-수체비차, 주행거리 297㎞, 주유량 25.69ℓ, 금액 LEI650,000-

 산뜻한 아침. 기분 좋은 출발이다. 어제의 그 청년이 긴 여행 즐겁게 하라며 손을 흔들어 준다. 낯선 곳을 여행하다보면 '자그마한 것이 삶이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코라아라고 반길 때, 지나가는 우리 나라 차를 볼 때, 가족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볼 때, 낯모르는 사람이 피곤을 씻어주는 웃음을 지어 줄 때, 아이들을 볼 때 여행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루마니아 사람들은 참 친절하다. 자본주의 때가 덜 묻어 선지 넉넉한 땅만큼이나 낙천적이고 따뜻해서 마음에서 울어나는 친절을 베푸는 경우가 많다. 그런 루마니아를 경계의 눈으로만 봤던 마음이 미안해진다. 도시의 문제아 집시를 때문이지만.

  오늘은 루마니아 여행의 진수 몰다비아 지방에 있는 다섯 개의 수도원을 보기 위해 부코비나로 간다. 몰다비아 지방은 완만한 구릉과 풍부한 자연의 혜택 속에서 루마니아의 중세문화를 꽃피워낸 곳이다. 특히 이곳에 있는 수도원의 벽화 프레스코화는 농민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종교의 성서를 벽에 그리기 시작한 이후 그림이 점차 더해지면서 수도원의 외벽에까지 그림이 그려졌다. 무명의 화가들은 농민들도 이해 할 수 있도록 성서, 옛날 이야기, 역사화, 몰다비아의 풍경 등을 그렸는데 50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낡고 벗겨지기도 한 프레스코화가 아직도 건재한 다섯 개의 수도원을 찾아가는 일정이다.

  E576번 도로를 탔다. 처음 여행계획을 세울 때 몰다비아 지방은 산맥이 있어서 산길을 피해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북상할 예정이었다. 루마니아의 엉망인 도로 때문이었다. 그런데 칼라타 지방의 작은 마을들은 보고 가자는 내 의견에 코스가 바뀌게 되었고 내륙으로 들어온 우린 어차피 산을 넘어야했다. 그러나 의외로 도로사정이 불가리아보다 훨씬 좋아 도로포장도, 이정표도 모두 Good이었다. 무엇보다도 깊은 산 속이 아니면 대체로 직선도로여서 몰다비아 지방으로 가는 부담이 덜 했다. 그만큼 평원과 구릉지대가 많은 루마니아였다. 역시 정보는 한계와 함정이 있었다. 특히 루마니아 정보는 옛날 정보가 대부분이어서 현실감이 많이 떨어졌다.

  시골마을 도로변에 벼룩시장이 섰다. 루마니아 벼룩시장을 보려고 차를 세웠다. 여러 가지 조악한 생필품과 농산물들을 팔고 있었다. 우린 쌀과 야채와 과일을 조금 샀다. 시장사람들이 동양인인 우리를 보느라 정신없고 아이들은 쫓아다니기까지 한다. 발칸지역 여행에선 우리가 주역이 될 때가 더 많다. 순수한 루마니아 사람들이다. 우린 큰 도시 비스트리타를 향해 벼룩시장을 떠났다.

클루지 나포카 중심지인 승리 광장

비스트라에서 만난 신혼부부와 가족들

 비스트리타는 종교개혁 시대에 마르틴 루터가 와서 포교를 한 도시로 규모가 큰 정교회가 많았다. 루마니아도 종교국가여서 사람들은 차를 타고 가다가도 교회 앞을 지날 때면 성호를 긋는다. 택시 기사도 그렇게 한다. 교회는 어디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고 도시는 나무가 울창해 중후한 분위기다. 큰 교회에 들어가니 신부님 제의 한 자락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축성 받고있는 무릎 꿇은 젊은 연인과 처녀의 어머니가 있었다. 결혼을 앞둔 연인인가보다. 다음은 7살쯤 돼 보이는 아버지와 아들도 똑같이 축성을 받는다. 동방정교회의 구조는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가 모두 비슷했다.

  도대체 삶이란 뜻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있나. 힘겹고 막막한 과정을 다 지나고 보면 그래도 희망과 감사로 채워지는 삶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한 달이 가까워오는 떠돌이 생활의 힘듬이 삶의 힘듬과 다를 봐 없어서 나도 신부님 앞에 무릎꿇고 축성을 받고싶다. 제발 숙소 때문에 고생하는 걸 좀 덜 하게 해달라고.

  오늘은 토요일 오후여서 루마니아 사람들의 휴일의 일상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결혼식을 마친 신랑신부, 나들이 나온 가족들, 페스트 후드 점의 떠들썩한 젊은이들. 공원에서 노는 아이들. 북적대는 도시 분위기에 나도 활기를 찾는데 남편은 도시를 빠져나갈 길은 기억해 두느라 바쁘다. 캡틴 정의 노고가 끝이 없다. 결혼식을 끝낸 신혼부부가 기념사진을 같이 찍자고 한다. 장식용 우리 나라 신랑각시 목각 인형을 선물로 주었다. 신랑신부와 우리부부가 가운데 서고 가족들이 뺑 둘러선 가족사진을 찍고는 술과 안주까지 주며 즐거워한다. 이렇게 낙천적인 사람들을 보니 덩달아 즐거워진다.

  몇 곳의 큰 도시를 경유하며 아침 8시에 출발해서 오후 5시에 모르도비차 수도원에 도착했다. 평원과 구릉지대 그리고 고원지대의 수림 등 변화무쌍한 자연을 보며 지루한 줄 모르고 달렸다. 무엇보다도 도로와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서 심리적 안정이 여유가 됐다. 모르도비차 수도원는 우리 나라 명찰들이 마을과 뚝 떨어진 깊은 산 속에 있는 것과는 달리 산을 넘고 평평한 평원이 이어지고 그리고 마을이 나오는 길 끝자락쯤에 있었다.

  새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리는 고요하고 정결한 수도원. 안팎이 온통 프레스코화에 묻힌 성당 풍경이 아주 생경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지금까지 무수히 봐 온 프레스코화와는 달리 이곳 수도원의 프레스코화는 이야기책을 보는 것 같아서 책을 읽듯 차분한 마음으로 보게 된다. 그리 크지 않은 수도원이 성스럽고 거룩해 보이는 것은 루마니아인의 삶과 역사가 배인 벽화 때문인가 보다. 우린 한시간 이상을 정적에 싸인 수도원에 머물며 불가리아의 릴라 수도원도,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도, 루마니아 수도원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삶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리고 변함없이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는다.

  밖으로 나오니 수도원 정문에서 새로 산 중고차를 색 테이프로 장식하고 빵과 포도주와 꽃을 올려놓고 신부님이 중년부부와 중고차에게 축성을 하고 있다. 어찌나 진지하고 경건한지 축복이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6시가 넘었다. 수체비차로 가는 길에 깨끗한 캠핑사이트가 있었다. 10유로다. 나도 축성을 받은 기분으로 오두막에 차를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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