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계곡의 영웅 바실 레프스키 생가에서

2003. 6. 6 금요일. 맑음(여행 34일째날)

카잔룩-소피아, 주행거리 213㎞,

 아침형인 난 언제나 일찍 깬다. 서향의 우리 방에선 중앙광장이 보였고 어둠이 남은 광장을 호텔의 불빛이 희미하게 비취고 있었다. 아침 6시가 가까워지자 대여섯명의 뚱뚱한 여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광장청소를 시작한다. 광장주위의 나무에서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고 7시가 되니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든다. 반갑게 만나고 인사하고 얘기하는 풍경이 꼭 시골마을 느티나무 밑 같다. 아직도 한참을 더 떠돌아야 하는 난 저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고 그리워진다. 남편이 이제서 잠에서 깬다. 어제 오랜 운전에 퍽 피곤했었나 보다.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에서 갔다가 어제의 그 소년을 만났다. 루세에서 왔다는 학생이다. 나는 볼펜 몇 자루를 소년에게 주었다. 씩∼ 웃는 모습이 귀엽다. 어제 호텔에서 방을 정하고 리셉션 아가씨에게 장미 박물관 위치를 묻고 있을 때 한 소년이 내게 왔다. 손엔 구형 카메라를 들고서. 초등학교 6학년쯤 돼 보이는 소년은 상기된 얼굴로 날보고 뭐라고 하는데 사진을 찍자는 것 같았다. 우린 소년과 사진을 찍었다. 그랬더니 나하고 둘이서만 다시 한 장 찍자고 했다. 손주 같은 녀석의 적극성에 소년과 나는 둘이서 어깨동무를 하고서 사진을 찍었었다.

카잔룩 호텔에서 만난 루세의 중학생들

카잔룩에 있는 장미산업박물관

 우리는 떠날 채비를 했다. 호텔 로비에 있던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사진을 찍잔다. 남학생도 여학생도 내 옆에서 찍으려고 야단들이다. 호기심 많은 순진한 아이들이 모두 꽃 같이 예쁘다. 장미계곡의 장미꽃밭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버스에 올라타고 모두 손을 내밀고 흔든다. 나도 오픈카에서 손을 흔들어 줬다. 오픈카와 버스가 점점 멀어진다. 장미꽃 같은 아이들이 탄 버스가 사라졌다.

  장미산업박물관을 찾아간다. 불가리아의 특산물인 장미향유는 발칸 산맥의 장미계곡에서 생산된다. 오랜 연구와 발전을 통해 특별하게 재배된 장미를 원료로 하는 장미향유는 세계에서 으뜸의 장미유로 최고급 향수나 초코릿, 화장품 등의 원유로 쓰이는 고가품이다. 장미산업이 발달한 카잔룩에선 장미가 한창인 5월말부터 6월 첫 주까지 장미축제가 열린다. 이 장미축제는 불가리아의 대표적인 축제 중의 하나로 지코 투어의 민사장은 올해는 장미 수확이 빨라서 장미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화려한 민속의상을 입고 아가씨들이 춤을 추며 장미꽃잎을 따는 행사는 5월말에 끝나지만 그 외에도 축제행사는 많을 거라고 했었다. 장미계곡에서의 장미축제는 단순한 축제의 의미를 넘어 카잔륵 지역의 삶의 형태와 정신과 전통을 반영하는 것으로 흥겹고 신명나고 독특한 볼거리가 있는 축제를 꼭 보고싶었다.

  그러나 시내도 시내를 벗어난 교외도 조용하고 한산할 뿐 축제의 흔적과 들뜬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어렵게 찾아간 장미산업박물관도 조용하고 소박했다. 우리가 찾아가니 박물관에 있던 여인이 연신 담배를 피우며 컴컴한 실내에 불을 켠다. 루마니아도 불가리아도 좀처럼 전기불을 켠 집을 볼 수 없는데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내부는 장미산업 전성기 때의 연구자료와 책자, 전통의상을 입은 장미꽃을 따는 아가씨 사진, 장미향이 배어있는 집유통과 향유를 만드는 과정의 여러 기구들이 전시되어있었다. 장미향수를 생산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아담한 박물관이 이채롭고 흥미 있었다. 선물로 목각인형에 들어있는 장미향수 5개 샀다. 장미향수는 우리 나라 찔레꽃향 같으면서고 더 은은하고 깊어서 마음에 꼭 들었다. 얼굴에 바르는 장미크림도 향이 좋아서 샀다. 수수하면서도 후덕한 종갓집 종부 같은 향이라고 할까?

  장미산업박물관 넓은 땅엔 실험용 장미들이 심어져있었지만 문외한의 눈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나라여서 자본주의 잣대로 보면 모든게 시시하게 서툴다. 특히 상품의 디자인이나 포장, 서비스 면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성실함이나, 과장되지 않은 솔직함이나, 내실 있고 실제적이며 정직한 그들의 기본질서가 보여 점점 정이 가고 신뢰가 가는 발칸지역 나라들이다. 그래서 점점 더 좋은 인상으로 다가오는 나라들이다. 독일 관광객을 실은 대형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안으로 들어간다. 우린 이곳을 떠났다.

집을지어 보호 중인 트라키아 인의 무덤

실제와 같이 만든 트라키아 인의 무덤 내부

 트라키아 인의 무덤을 찾아갔다. 불가리아 땅에 살던 원주민으로 BC 480년에 최초로 국가를 세웠던 트라키아 인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트라키아인의 무덤은 기원전 4C 후반의 것이다. 원형은 보존을 위해 통제하고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었다. 무덤 안은 발굴된 부장품들과 그림이 선명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2천 5백년 전 트라키아인의 전투장면과 장례의식 등 삶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생생하다.

  숲에 들러싸인 무덤가에서 5살쯤 된 사내아이들이 물총놀이를 하고 있다. 웃통을 벗은 꼬마들의 뽀얀 살이 햇빛에 핑크빛이다. 루마니아도 불가리아도 시골길을 가다보면 웃통 벗은 남자들을 흔히 본다. 어른이나 아이나 남자가 웃통을 벗는 것은 여자가 치마를 입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보다. 이리저리 뛰며 놀던 꼬마들이 동양인이 생소한지 호기심을 보인다. 파란 눈에 금발머리, 오동통한 뽀얀 피부가 얼마나 예쁜지 웃통 벗은 모습을 사진 한 장 찰깍. 초콜릿을 주었다. 트라키아인의 무덤가 낮은 언덕에서 꼬마들이 뛰놀며 생성과 소멸의 순환고리 한 끄트머리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초여름 햇빛을 받으며…

바실 레프스키의 머리털을 보관한 함

 

우리는 카를로브로 떠났다. 카를로브는 장미계곡의 영웅이며 불가리아 독립영웅 바실 레프스키의 고향이다. 계곡 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 카를로브엔 레프스키의 사진이 거리 곳곳에 붙어있었다. 박물관이 된 생가 마당엔 레프스키 어머니의 석상이 있고 오랜 터키 지배로 터키풍으로 실내장식이 되어있는 집이 잘 보존되어있었다. 제법 큰 전시관엔 레프스키의 모든 것이 전시돼 있었는데 한글로 번역된 '장미계곡의 독립영웅 바잘 레프스키'란 책도 눈에 띈다. 박물관의 아가씨는 열심히 보는 우릴 2년 전에 지었다는 마당 뒤켠의 작은 교회로 안내한다. 교회는 잠겨있었다.

  레프스키의 머리카락을 보존하기 위해 지은 네 다섯평 남짓한 교회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사각형 박스를 두발로 받들고 있는 상자 속에 레프스키의 긴 금발 머리카락이 있었다.

  불가리아 정교회 수도사였던 바실 레프스키는 500년 지배의 터키 탄압에 분연히 일어나 수도사 제복을 벗고 수도사의 긴 머리카락도 잘라 어머니에게 드리고 그리고 총을 들고 독립군이 되었다. 중앙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조국 불가리아 독립을 위해 투쟁에 나섰던 레프스키는 1872년 터키군에 잡혀 소피아에서 사형당할 때까지 36년 6개월의 젊은 삶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불살랐다. 바실 레프스키의 죽음이 불씨가 되어 5년 후인 1877년 러시아 불가리아 연합군은 터키를 물리침으로서 독립을 하게 된다.

  어머니가 간직하고 있던 아들의 머리카락이 레프스키의 생가를 찾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머리카락 옆엔 레프스키가 머리카락을 잘라 어머니에게 드리고 집을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한말이 불가리아 어와 영어로 A₄용지크기의 종이에 써 있었다. 남편이 그 글을 비디오에 담다가 울먹인다. 레프스키는 어머니를 품고 혁명투사가 되었다는 말에 나도 목이 메인다. 비장함이 감도는 교회. 방명록에 나는 글은 남겼다. 우리의 독립투사들과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진 젊은 피가 벽에 그려진 선명한 코레스코화 위에 붉게 뿌려지는 것 같다. 부끄럼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전율처럼 나를 흔든다. 우린 레프스키의 머리카락 앞에서 묵념을 하듯 고개를 숙였다.

  마당으로 나오니 두 아가씨가 레프스키 어머니 석상 왼손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고 있다. 나도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어머니란 존재, 어머니의 의미, 어머니 힘…. 불가리아 사람들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레프스키를 키운 어머니의 정신이 피를 타고 뜨겁게 전해오는 것 같다. 오후 한시면 문을 닫는다는데 벌써 한시가 넘었다. 안내를 하던 아가씨는 내일 이곳에서 굉장한 축제가 있으니 보고 가라고 말하며 우리가 떠나는 박물관 문을 닫는다.

  오픈카페에서 콜라와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으며 레프스키와 어머니, 독립전쟁과 젊은 피의 여운에 오래도록 젖어있었다. 금요일 오후의 거리는 축제 준비 때문인지 분주하고 수선스럽다. 군인들까지 바삐 움직이는 걸 보니 내일 있을 행사가 크긴 큰 것 같았다. 장미계곡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호텔을 떠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장미꽃은 못보고 산밑 도로를 따라 꽃 진 장미 밭만 보면서 실망했는데 축제마저 간발의 차이로 포기해야하니 속상했다. 6월의 태양이 이글거린다.

 아쉬움을 안고 바로 이웃에 있는 소프트로 떠났다. 불가리아 근대문학의 아버지 이반 바조브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인자하고 온후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의 이반 바조브. 박물관엔 '이반 바조브 선집'이란 한글 번역판도 전시되어 있었다. 시와 장편소설을 많이 쓴 불가리아의 대표적 문인으로 특히 1893년에 발표한 터키에 저항하는 내용의 장편소설 '멍에'가 많이 알려져 있다. 박물관 벽에 장미축제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있어서 선물로 한 장 달라고 했더니 벽에 붙어있는 것밖에 없는데 내일이 마침 축제일이니 포스터를 띠어가란다. 장미축제의 유일한 흔적이 될 포스터를 소중하게 가방에 넣었다.

 

이반 바조브의 동상 옆에 박물관이 있다.

 이제 소피아로 돌아간다. 여기서 소피아까진 140km다. 지난 5월 7일 고물차 오픈카를 몰고 소피아를 떠난 지 31일 만이다. 시작이 반이라더니 어느새 발칸 3개국 여행이 끝나간다. 해냈다는 뿌듯함이 감개무량하다. 우린 힘차게 악수를 하고 오픈카에 올랐다.

  불가리아를 동서고 가로지르는 산맥을 따라 산길을 달린다. 소피아는 해발 700m 분지에 있는 도시여서 계속 산을 끼고 달린다. 산이 많은 우리 나라 같은 풍경이 오히려 반갑고 친근하다. 여유도 생겼으니 콧노래까지 부르며 3시간정도를 달렸다. 긴장으로 부들부들 떨며 떠났던 그 거리를 성취감을 안고 당당히 돌아왔다. 호텔에 찾아오니 주인이 우릴 알아본다. 전화를 받고 달려 온 지코투어(www.jikotour.com) 민지홍 사장이 까맣게 탄 우릴 보고 기막히다는 표정이다. "모두들 기도 많이 했어요. 어르신의 여행계획이 무모하리만큼 황당했거든요. 젊은 사람도 꿈도 못 꿀 일이거든요" 고마운 민사장이다. 오픈카를 반납했다. 섭섭한 마음이야…. 서울로 전화를 했다. 서울의 가족과 합창으로 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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