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에서 아침, 슬로베니아에서 점심, 크로아타아에서 저녘을.

2003년 6월 18일 수요일 흐림, 비(여행 46일째날)

세까우-류불랴나-자그레브, 주행거리 165㎞,

 가랑비가 내린다. 영주의 방에서 촉촉이 비에 젖은 마을을 내려다보며 지난밤 일을 떠올린다. 체코에서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온 우리에게 패랭이꽃 화분이 곱던 집 할머니가 방이 없다고 했을 때 얼마나 섭섭했는지. 다락방이라도 있었으면 했었다. 성에서 게스트하우스가 full이라고 했을 때도 그랬다. 석달을 떠돌 우린데 하룻밤 방값으로 64유로(9만원)를 지불하는 것은 너무 부담이 됐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세까우 고성에서의 하룻밤은 잊을 수 없는 멋진 추억을 우리에게 선물해줬다. 앞으로 삶에서의 모든 우여곡절은 최선으로 가는 통로라고 생각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아침식사를 하러 레스토랑으로 갔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잔 사람들이 넓은 식당을 꽉 채웠다. 간밤의 즐거운 여운이 아직도 남은 듯 동아리 멤버들은 밝고 화기애애하다. 가족 중심의 축제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가족이 있기에 세상은 더 아름답다는 것도....


 우린 유고 연방이었던 슬로베니아로 떠났다. 11시 30분 국경을 통과할 때쯤엔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슬로베니아는 비자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있어서 혹시 했는데 그대로 통과다. 슬로베니아 지도는 오스트리아처럼 도로번호가 표기되어 있지 않아서 조금 불편하지만 작은 나라고 렌트카 회사도 인정하는 안정된 나라여서 모든 게 수월할 거라는 긍정적인 체면을 스스로에게 걸고 수도 류불랴냐를 향해 달린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승차감 좋은 은색 포커스가 질주한다. 발칸 3개국을 돌던 똥차 로바로 달려야 했다면? 차 때문에 심리적 고생이 무지 컸던 발칸유럽 여행이 옛날같다. 


 슬로베니아의 자연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산에 둘러싸인 조각보 같은 옹색한 농경지나, 산자락에 앉긴 작은 마을이나, 굽이돌고 오르고 내리고 터널을 지나는 도로나 모두 낯익은 우리 산천이다. 빗속에서 4번의 Toll비를 내고 오후 한시가 넘어 류불랴냐에 도착했다. 중앙역 근처에서 주차하우스를 찾은 우린 4일간의 주차료를 지불하고 배낭을 꾸렸다. 주차장에서 간단한 식사를 한 우린 배낭을 메고 중앙역으로 뛰었다. 마침 2시 10분에 자그레브를 거쳐 베오그라드까지 가는 기차가 있었다. 10분간의 여유. 환전을 못해 카드로 기찻삯을 지불하고 6번 홈으로 마구 뛰었다. 그러나 10분 연착한 기차는 여유를 찾은 우리를 태우고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를 향해 출발했다. 렌트카 여행에서 배낭여행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숙명적인 모자이크국가였던 유고연방이 해체되고 각각 독립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두 나라의 수도 류블랴냐와 자그레브는 135km 떨어진 거리다. 바로 이웃이지만 안전상의 문제로 크로아티아로는 차를 가져갈 수 없다는 렌트카 회사의 규정때문에 슬로베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들어갈 수 없어서 제2차 여행은 마치고 독일로 돌아온 후에 마지막으로 크로아티아를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동생의 베를린 개인전 연기로 베를린에서 보낼 일주일을 벌게 되어서 슬로베니아에서 배낭여행으로 질러가기로 했다.


 비가 그치고 비구름 덮인 산과 강(사바 강)을 끼고 달리는 기차는 평원이라곤 없는 산골 마을을 따라 달린다. 차창 풍경이 눈꽃열차를 탄 듯 강원도 산골풍경을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계곡을 끼고 기차와 도로가 나란히 간다. 영월을 지나 정선 사북을 거쳐 도계로 가고있는 것 같다. 동해를 지나 동강쯤에 이른 것 같은 곳에서 기차는 2번째 정차를 한다. trbovlje라는 역이름을 어떻게 읽어야할지... 오후 3시다. 기차가 다시 출발한다. 자주 나타나는 굴도, 계곡을 흐르는 물빛도, 산도, 바위도, 물안개가 퍼진 아카시아 숲도, 전혀 낯설지 않다. 낯선 것은 옆에 탄 승객들과 역이름과 글자뿐이다. 낯선 슬로베니아 글자만 보이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낯익은 우리 산하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알아듣지 못하는 슬로베니아 말로 창 밖 풍경을 열심히 설명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지금 영월을 지나 도계로 가고있다구...’ 


 기차는 한 시간쯤 달려 국경마을 DOBOVA에 도착했다. 15분 쯤 정차를 했고 세관원과 경찰이 차례로 올라와 이것저것 묻는다. 어디가냐, 언제 돌아오냐, 왜 가느냐, 세관에 신고할 것 없느냐 등. 경찰은 우리 여권을 보더니 본부로 연락을 해서 코리아 운운하며 한참을 떠들더니 여권에 출국사증을 찍어준다. 우리처럼 기차로 국경을 넘는 코리안이 별로 없었나보다. 이 기차는 베오그라드까지 가는 기차다. 아직도 민족간의 분쟁요소가 많이 남아있는 예민한 지역이다. 우리도 이번 여행에서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세르비아 등은 뺐으니깐.... 그래서 렌트카 회사들도 국경통과를 불허하나보다.       


 다시 비가 내린다. 슬로베니아 국경을 통과해서 크로아티아로 들어왔다. 서울로 전화를 했다. 예정에 없던 기차여행을 한다는 소식을 전하는데 이번엔 크로아티아 세관원이 들어온다. 신고사항 없음. 다시 경찰이 들어온다. 입국심사를 한 후 입국도장을 찍어준다. 처음 기차로 국경을 넘어보는 경험이어서 새롭고도 신기했다. 차창 풍경이 서서히 달라진다. 강과 계곡과 산림이 사라지고 회색빛 칙칙한 도시, 제멋대로 지어진 건물과 알 수 없는 낙서들이 어지럽게 도시의 경관을 헤치더니 오후 4시 43분, 기차는 자그레브 역에 도착했다.


 자그레브는 쾌 큰 도시다. 예약한 유스호스텔은 중앙역에서 멀지 않았고 한 달이나 일찍 온 우리에게 리셉션의 남자는 ‘코리아 Mr. 정’을 확인한 후 욕실없는 방은 있다고 한다. 아침도 포함되지 안은 좁고 냉방시설 없는 방이 1박에 30유로다. 상당히 비싼 편이다. 남자가 내일은 공휴일이니 미리 장을 봐두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퇴근 무렵, 낯선 도시의 파장 분위기가 나그네를 우울하게 한다. 처량하고 서글퍼서다. 역으로 통하는 지하도 에스컬레이터엔 휴일장을 봐 돌아가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설익은 자본주의 냄새가 확 풍기는 거리의 비릿한 냄새가 나그네를 밀어낸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고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 유스호스텔로 돌아왔다. 피곤할 땐 라면이나 누릉지가 최곤데 다 두고 왔으니 어쩌랴. 낯선 도시에서 찾아 헤매는 수고가 이젠 힘겹고 지겹다. 덥고 구차한 유스호스텔 방구석에서 자그레브의 첫 밤을 맞는다.


 오늘은 오스트리아의 고성에서 영주가 된 듯 우아한 아침식사를, 점심은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냐 지하 주차하우스에서 물 말은 찬밥으로 구차한 점심을, 저녁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생존을 위한 우격다짐 햄버거식사를 했다. 아~ 나그네의 고달픔이여....

편도 기찻삯 : 2등 칸 2697 KUNA   Y. H : 30 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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